15년간 영문도 모른채 강금당한 오대수는 자신이 강금당한 이유에 대한 대답을 얻지 못해 미칠 지경이며 그 미치는 지경이 그 대답없음에 대한 답답함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 속의 이 그림은 적절한 선택이었는지 모르겠다.그림의 제목은 [슬퍼하는 남자] 1892년에 완성된 이 그림은 벨기에 출신의 후기 표현주의 화가 제임스 시드니 앙소르(James Sydney Ensor)의 그림이다. 화가 스스로 위기가 닥쳤을 때 완성했다는 이 그림은 영화 속 오대수의 알 수 없는 외로움과 고독과 쉽게 오버랩 된다.그림의 아랫부분에 적혀 있는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라는 경구는 정말이지 오대수의 더욱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더 극명하게 만들어준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혼자라고 생각하겠지만, 갖힌자의 대답 없는 고뇌를 어찌 표현하느냐를 이 작은 그림으로 총화시켜 주는 것 같다. 급기야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이 스스로 헝크러트리고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오대수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그림과의 오버랩 이후의 독백 가스가 나오면 ~ 잠이 들고 일어나면 머리고 깍아 주고 몸도 씻어주었다는 비능동에 맡겨 버린 체념을 통해 스스로를 지워버리는 오대수는 영화 속에서 그 어떤 주인공보다 애처롭다. 그래서 그의 얼굴과 결코 다르지 않는 이 그림속의 남자처럼 웃을 수도 울지도 못하는 이의 마음이 쓸쓸히게 전해진다.
by kinolife 2006. 7. 12. 21:15

지하철 테러범에 관한 영화 <튜브>는 일종의 테러를 소재로 한 액션 영화지만 영화 개봉 즈음에서 발생한 대구의 방화범으로 인한 지하철 사고의 여파로 액션이 아닌 재난영화가 되버린 비운의 영화다.
철저하게 헐리우드 스타일의 극전개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영화는 조금은 빈약한 스토리와 완벽하지 못한 CG, 그리고 극의 리듬을 깨는 러브 스토리까지 진부하면서도 산만한 액션영화의 모든 법칙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기존에 우리영화에서 다루지 못했던 소재를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다.
감정과 내용 모두가 과잉이 되어버린 부분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배두나는 항상 악기통을 하나 들고 다닌다. 크기로 봤을때는 바이얼린이 아닌가 싶은데 역시 이 부분은 악가 전공자가 봐야 명확해 질 것 같다. 배두나가 들고 다니는 이 악기통 밖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한 현대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그림 "Kiss"가 옮겨져 있다. 악기통의 굴곡을 그대로 옮겨받은 그림 "Kiss"는 여주인공의 짝사랑을 더욱 스산하게 하는 장치로 보여진다. 1907년에 그리고 시작해서 이듬해에 완성한 이 그림은 화려한 색체에 애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비극적인 사랑(사실 그렇게 비극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겉도는 느낌이지만)의 메타포로 쓰여서 그런지 스산하게 보인다. 물론 그런 느낌에는 지하라는 주된 공간과 어두운 조명으로 인한 분위기 연출의 영향이 없지 안겠지만, 역시 이들 캐릭터들의 우울한 과거와 현재가 그림을 비켜갈 수 없기 때문이 주된 요인이다.크림트의 다른 그림 역시도 마찬가지지만 빨아들이는 듯한 색감이 오히려 쓸쓸한 감상을 전해주는 그의 그림이 이 불운한 액션영화에 등장하는 것은 약간 오용된 듯한 느낌이 든다. 편견인가? 역시 영화는 성공을 하고 볼 일인가 보다. 재미없고, 흥행에 실패해서 그런지 그런 자잔한 것 깥지 뭔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by kinolife 2006. 7. 12. 21:14
2003년 가을, 국내 영화계에 섹쉬하면서도 슬픈 영화 한편이 크게 사람들의 이름에 오르내릴 것 같다. <정사>에서의 화려한 데뷔이후, <순애보>에서 조금 주춤했던 이재용이 칼을 갈며 내 놓은 영화 <스캔달-조선남여상렬시자>가 바로 그 작품.

18C 관능문학의 대표작이라고 일컫는 라클로(Pierre Choderlos de Laclos)의 원작 소설 <위험한 관계 Les Liaisons Dangereuses>를 원안으로 했다는 데서 영화계는 물론 순수문학인들에게도 주목을 받는 이 작품은 단순히 옛 유럽문학을 우리식으로 옮긴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역사의 과거로 되돌아가 현재의 이야기를 한다는 복합적인 정서의 결합체로서의 관심은 적지 않아 보인다. 이런 궁금증과 기대들은 영화가 공개되기 전의 기대는 영화가 공개되고 난 이후 더욱 더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오고 있으니 말 그대로 이슈작이 나온 셈이다. 문학의 완성도에 전혀 누가 되지 않는 영화적 재해석과, 시대여행이 지루하지 않도록 배치한 우리 멋의 극치, 그리고 그에 역시 빠질까 신경을 쓰고 있는 배우들의 연기까지 어디 하나 험을 잡기가 쉽지 않은 웰메이든 영화의 표본을 보여주는 듯 하다.

이러한 영화적인 요소만큼이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은 옛이야기를 현대식으로 풀면서 중간중간에 보여주는 남자 주인공 조원의 그림솜씨가 더 없이 눈이 풍성한 식탁으로 초대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림은 현재 충남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있는 윤여환 화백의 그림들이다. 한국화의 묘미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윤화백의 그림은 말 그대로 몰라서 그 가치를 알지 못했던 미지의 개쳑이 주는 기쁨을 전해준다. 어떤 그림이 이전의 윤화백 그림이며, 이번 영화를 위해 새롭게 그린 그림이 어떤 것인지는 구별되지 않지만, 더군다나 그의 홈페이지에서도 영화 속의 그림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들이 없어서 조금은 답답하기는 하지만, 영화를 보기전에..그리고 다시 영화를 보고 나서 보아도 적지않은 기쁨들을 주는 그림들이다.

한국화에 대한 조예는 전혀 없는 나지만, 예쁜 그림들에 대한 솔직한 감상은 궂이 숨길 필요가 없을 듯 싶다. 자! 그럼 차례대로 그림들을 감상 해 보자.


by kinolife 2006. 7. 12. 13:47

[수코의 아이들] 과  [수콕메달들] (240×170㎝, 1987년작)

2000년 경, 막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dbdbdb)의 내리막길의 정점에서 한 편의 한국 다큐멘터리가 영화인은 물론 문화계의 관심을 끌었었다.  영화의 제목은 <하늘색 고향> 감독은 여류감독 김소영이었고 다큐멘터리의 소재는 소련의 우즈베키스찬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족화가 신순남 화백에 대한 이야기. 시대는 1937년부터 스탈린에 의해 일본과의 전쟁을 예견하고, 러시아 국경 지대의 한인들을 이주시킨 일종의 '강제이주'의 역사를 시발점으로 한 우즈베키스탄에서의 한인들의 생활, 그 중에서도 화가 신순남의 인간사와 그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처절한 우리 민족의 또 다른 역사를 그리고 있다고 한다. 그 당시엔 개봉이 되지 못했고, 지난 2002년 뒤늦게 서울의 몇몇 극장에서 개봉해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고 한다. 나 역시도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우연히 이 영화에 대한 소식을 담은 기사를 다시 보았고 그 때(2000년 경)가 생각이 나서 이래 저래 정보를 모아 보았다.

영화 초입, "“우리는 노예였습니다. 노예에겐 이름도, 민족도 없습니다. 그래서 난『레퀴엠』에 얼굴을 그려 넣지 않았습니다..."라는 신순남 화백의 말로 시작한다는 영화는 이제 개봉도 끝이 나고 몇몇의 사람들의 기억에만 남게 됐다. 이런 영화들이 간간히 작은 공간에서 상영되고 알려지고, 하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영화가 화백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 속의 주인공은 신순남 화백과 그의 자식과도 같은 그림들이 될테다. 그 중에서도 신순남 화백의 대표작인  [하늘색 고향]과 [전설] [레퀴엠], 그리고  세편의 그림들을 더 올려본다.

[장미색의 눈(雪)]
연작 [레퀴엠-하얀새 검은해] 36m (2m×3m×총18점)
연작 [하늘색 고향] (8×3m, 2×3m, 88년작, 4부작의 대형유화)
연작 [전설] (2×3m 총 26점, 가로길이 52m)

신순남 화백이나 영화에 대해 더 관심이 있으신 분은 그림 위, 링크되어 있는 홈페이지에서 다 많은 정보 얻으시면 됩니다.

홈페이지  http://www.sky-blue.co.kr

by kinolife 2006. 7. 12. 13:38

영화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에서 주인공인 핀 벨(에단 호크 분)이 커서 어릴적 꿈이었던 화가로서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벨의 그림은 벨의 성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중요한 도구이면서도 그의 성장과 함께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은 상징이기도 하다. 어릴적 부터 성장기까지 보여지는 영화 속의 이 그림들은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 프랜시스코 클레멘트( Francesco Clemente)의 그림들이라고 한다. 그는 이 영화 이외에도 영화 <굿 윌 헌팅 Good Will Hunting>에서는 최면술사로, 또 다른 멕시코 영화 <도대체 훌리엣이 누구야? Quien Diablos Es Juliette?>에서도 단역으로 촐연하기도 해 영화와의 인연이 긴 화가이기도 하단다. 그의 그림엔 영화만큼이나 독특한 향내가 난다. 내가 아시는 어떤 분은 같이 영화를 보고 나와선느 그냥 편한 그림들을 쓱쓱 그리는데 잘 그리는 걸 보니 화간가봐라고 했던 말이 생각이 나는데, 정말이지 별로 어려운 것 같지 않는데 내가 그린다면 하면 깝깝한 걸 보면 화가라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은 정말이지 선택받은 재주인건 분명 한가 봅니다.

by kinolife 2006. 7. 12. 13:23
"Double portrait of Lucaian Freud and Frank Auerbach" 1964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오프닝에는 영화 속의 이야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그림 두 점이 벽에 걸려 있다. (아래 그림과 연작 인듯 싶은데 정확하게 무슨 그림인지 모르겠기에 둘 다 올렸다,) 그림속의 남자는 얼굴이 이그러져 있어서 누군지를 알 수가 없다. 영화 속에서 폴을 총으로 쏜 잔느는 그 남자가 누군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림 속의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져 알 수 없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 잔느의 대사와 절묘하게 오버랩된다.

"Double portrait of Lucaian Freud and Frank Auerbach" 1964

Study for Portrait of Isabel Rawsthorne1964

물론 아래에 잔느를 연상시키는 듯한 그림에서도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단서보다는 잔느적인 느낌만이 남아 있는 그림이지만,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속의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Vacon)의 그림은 이 영화속의 주인공들에게 있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자아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의 주제처럼 혼돈스럽고 부정확한 인간의 관계를 잘 드러내 준다. 특히 각각 남자 여자의 그림은 개인의 혼돈을, 두 그림을 붙혀 두었을 때는 더더욱 정리되지 않은 혼돈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 속의 주인공들의 자아와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 속의 피사물이 주는 느낌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by kinolife 2006. 7. 12. 13:16
영화 <미스터 빈 Mr-Bean>에는 빈이 어이없게 망쳐 버리는 그림이 한 장 있다. 영화 속에서는 손으로 짓이겨진 이 영화 속의 그림은 영화적 장면에 의해 그의 재치로 다시 소생한 듯 보이지만, 만약 영화 속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빈은 예술품을 망친 범죄자로 자책감에 휩싸여 감방에서 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겠다. 영화 속에서 미스터 빈에 의해 곤욕을 치르는 모델이 된 그림은 미국 출신의 화가 제임스 애보트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가 1872년 경에 그린 <화가의 어머니 Portrait of the Artist's Mother >라고 한다. 현재는 파리의 오르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군더더기 없는 구도와 깔끔한 색채가 단정함과 진득함을 전해 주는 담백한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by kinolife 2006. 7. 12. 13:12
회시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찍은 길가의 나뭇잎...
이름하나 모르지만..나의 새 카메라 셔터를 눌러본다..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르는 사진이지만...이상하게 똑딱이 카메라 하나 들고 무언가를 찍겠다고 카메라 렌즈를 보는 그 짧은 시간엔 나 역시도 사진을 찍는 무엇..피사체가 되는 느낌이다.

by kinolife 2006. 7. 12. 13:01
회사 근처에 프렌치 가든이라는 아담한 꽃가게를 지나가면서 보다가 화분을 사야 겠다고 생각한건 내게 있어선 큰 용기였다. 매번 선물 받은 놈들도 죽여버리고 마는 여유 없음이 언제나 살아가는 데 독인지 모르고 지내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쁜 가게에 혹해서 이쁜 화분을 두개 사 버렸다. 벌써 내가 키운지 한달도 넘어가도록 죽기는 커녕 더욱 잎을 틔워 내는 이 놈들이 마냥 귀엽다.

왼쪽의 꽃이름이 레베카..오른 쪽 놈이 아펠란드라라고 한다.
어찌 이 이름들을 외우는지..참 꽃집 언니는 신기해!!....내가 팝 가수나 영화 배우 이름 외우듯이 마구마구 외우시네...역시 신기하다.


화분을 찍는 김에 오른쪽 책상 쪽도 찍어 본다.
서울역 Book-Off에서 산 일본 만화책도 눈에 보이고..세일하는 김에 라는 미명아래 사들인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들도 눈에 보인다. 아직 한권도 읽진 못했지만 웬지 모를 이 뿌듯함은 역시 나의 지적 허영.....-_-;;
머 이대로도 좋다. 2006년 7월의 나의 사무실 모습....
by kinolife 2006. 7. 12. 12:57

2001년, 122M, Color
감 독: 유키사다 이사오(行定勳)
각 본 : 쿠도 칸쿠로(宮藤官九郎)
원 작 : 카네시로 카즈키(金城一紀)

주연:  쿠보츠카 요우스케(窪塚洋介)
         시바사키 코우(柴嘯コウ)
         오오다케 시노부(大竹しのぶ)
         야마자키 츠토무(山崎努)
         호소야마다 타카히토(細山田隆人) 
         무라타 미츠루(村田充)  
         야마모토 타로(山本太郎)  
         아라이 히로후미(新井浩文)  
         하기와라 마사토(萩原聖人)  
                                                              김민  
                                                              명계남  
                                                              오오스기 렌(大杉漣)  
                                                              시오미 산세이(塩見三省)  
                                                              츠다 칸지(津田寛治)  
                                                              나카지마 타케시(仲島武士)  
                                                              아키야마 미키(秋山実希)  
                                                              미즈카와 아사미(水川あさみ)  
                                                              미나카와 사루토키(皆川猿時)  
                                                              요시나가 유키(吉永雄紀)  
                                                              이사카 슌야(井坂俊哉)  
                                                              누쿠미즈 요이치(温水洋一)  

음 악 : 쿠마가이 요코(熊谷陽子)
          우라야마 히데히코(浦山秀彦)
          MEYNA Co.(めいなCo.)

일본이나 어디나 땅땡이가 좁은 곳에 사는 민족들이 가진 가장 큰 단점은 타인에 대한 탄력성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 몸을 틀면 다른 사람이 데일 정도로 답답함을 전해주는 민족들에겐 대지나 지평선을 소유한 나라의 사람들보다 타인에 대한 편협한 감정을 타고 나는 듯 싶다. (이것 역시도 편협한 나의 편견인지도 모른다.) 좁은 땅에 사는 만큼 속이 좁아지는 것...머 결코 틀리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지 싶다. 영화의 시작에 주인공의 대사 "말하자면 이건 내 연애 이야기이다..."하지만 역시 이 이야기는 이 좁은 땅을 가진 일본인과 역시 만만치 않은 좁은 국토를 가진 한국인과의 관계(주인공이 이야기한 연애 관계는 결코 아닌)에 얽힌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아버지가 한국인이지만 일본에서 태어난 '나'는 국적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은 있지만, 선택을 하기 위한 과정의 험난함을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나는 내가 누군지를 잘 모르겠으니 지상에서의 삶은 언제나 표피만을 핧듯 겉돌뿐이다. 그렇게 마음에 안정을 둘 데가 없으니, 공부도 시큰둥이고, 학교 생활도 시큰둥이고 같이 학교생활을 하는 동급생들도 시큰둥이다. 이 삼박자 시큰둥은 한국인의 피를 가진 나에 대한 의문이 끝나지 않는 동안은 별 결과는 갖기는 힘든 이슈다. 자신이 무엇인지 스스로를 알기위해서는 자기 성찰의 계기가 필요한데 그 계기는 우연히 연애의 감정을 가지게 된 여자친구와의 사랑과 좌절(영화 속에 보이는 섹스 도중의 여자의 행동은 지극히 이상스럽다 싶은데, 일본인들에 대한 혐오감을 느낄 정도로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이 감정적으로 드는 장면이다.)..그리고 좌절에서 탈줄하면서 계기를 맞는다.

사춘기에 이성을 통해 세상에 눈을 뜨는 것과 함께 매번 대화의 연결이 안 되던 아버지의 단언 속에 묻어있던 신뢰회복은 스스로에 대한 대답을 얻는 힌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어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만나면서 스스로의 존재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역시 청춘이란 좌절하기도 쉽고, 때에 따라서는 다시 일어나기도 쉽다. 그들에겐 시작하는 자의 여유와 남은 시간이 많다고 하는 절대적인 힘가 있기 때문에 그 방황이라는 과정이 삶을 흔들수는 있어도 뿌리 뽑지는 못하는 것이다. 나무에 흔들리지 않는 나무는 살아있는 나무가 아닌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 , 방황없는 청춘리안 역시 무언가 앙꼬가 빠진 찐빵같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성장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정해지지 않은 인생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며 스스로를 부정해 보는 것이며 그러다가 기성세대에 손가락질을 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그냥 한번 삶에대 화풀이를 해 볼 수 있다는 것...그럼으로해서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는 해답을 자연스럽게 깨닫는다는 것이다. 이 영화 속에는 마치 그런 방황이 일본에서의 외국인 3세 아니, 일본에서 재일교포라고 불리는 한국인들의 삶에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건 성장영화 속의 방황에 기폭제가 될지는 몰라도 근본적인 원인 같아 보이지 않는다. 영화 속의 요우스케는 일본이었다고 해도 상당히 말썽꾼이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그러하며, 재일교포이면서도 일본에서 자신의 삶의 길을 찾는 다는 면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다만 재일 한국인이었기에 방황의 이유가 보다 분명했을 뿐이다.

어찌 보면 이 영화의 소재는 재일 한국인, 방황하는 청춘 머 이런식으로 수식화 하다 보면 무척이나 빤한 영화일 수 있다. 그래서 재일 한국인이 아니거나, 재일 한국인과 연관이 있었던 일본인이 아닌 다음에야 그저 또 다른 청춘영화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주인공의 말대로 이 영화는 연예 영화일 수도 있다. 그래 살아있다는데 불만은 없다. 살아 있어야 연애도 하고 방황도 하고 인생의 해답을 찾는데도 이유가 있다. 똑바로 살아 있어야 이 영화 속의 방황고 눈물이 삶에 좋은 영양이 되는 것이다. 사족으로, 영화 속의 쿠보츠카 요우스케가 우리나라의 양동근처럼 색깔있는 배우로 느껴지는 건 이상한 나의 혼란인지 아닌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나의 영화보기도 방황에 빠지고 있다. 영화를 이상하게 보고(Go) 있다! 불만 있으세요?..   써 놓고 보니 상당히 이상하다.

by kinolife 2006. 7. 12. 0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