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두고 오랜동안 못 읽다가 2013년 도서목록에 어렵게 끼워 넣었다. 시에 대한 이해는 삶이 팍팍해 질수록 더 멀어지는 것인지..아니면, 삶의 극한으로 치달아 그 끝에서 만나게 되는 것인지....이 모호함은 장석남의 이 시집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시는 외피적으로 읽게 되는 것 같고..책 뒷면의 김연수 해설을 읽어도 오롯이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래도 겨울의 끝에서 시집을 만지작 거린 기억으로도 족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덮었다.
시집 한권 다 읽어 내기 힘든 삶을 사는 요즘의 내 모습은 시집 한권 놓여 있지 않은 딱딱한 테이블 같다는 생각을 한다. 회사 자리 이사를 핑계로 후다닥 수박 겉핡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빛의 속도로 슬쩍 읽고 말았다. 늙는다.나이 든다..그건 감수성이 죽는다는 것과 또 다른 동의어 인 것 같다.
- 달의 발자국 -
구두는 늘 혼자 오는 법이 없다.
길을 가다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내려다보면
지나온 발자국들이 모두 따라와 있다.
그때부터 조심조심 걷게 되었다.
남긴 발자국을 속이기 위해서다.
보도에서 껑충 뛰거나 일부러 넘어지기도 하고 엉금엉금 기어가기도 하다가
뒤돌아보면서
발자국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좋아한다.
그렇게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집에 돌아와 대단히 편해한다.
발자국 하나 묻어 있지 않는
구두에 안심하면서 자리에 누우면
하루만큼의 아픔이
백지처럼 지워져 있다.
하지만 잠이 들라치면
질긴 발자국 하나가 여간 성가시게 하는게 아니다.
그래서 잠도 자지 못하고
약칠을 하고 광을 내어 구두를 못살게 한다.
별빛 하나에도 우리를 빛낼 수는 있다 한 방울 눈물에도 우리를 씻을 수 있다 버려진 정신들을 이끌고, 바람이 되어 한반도에 스민 잠을 흔들 수는 있다. 춥고 긴 겨울을 뒤척이는 자여 그대 언 살이 터져 詩기 빛날 때 더 이상 詩를 써서 詩를 죽이지 말라 누군가 엿보며 웃고 있도다. 웃고 있도다.
- 남몰래 - - 復古調 . 3 -
남 몰래 題目도 없이, 제가 비도 되고 별도 되고 또 어둠도 되어 그대를 어지럽히는 밤이면 그대는 마른 개울 넘쳐오는 시냇물을 보아요 그대 얼굴 흔들리는 시냇물 속에 비도 되고 별도 되고 또 어둠도 되어 그대 조그만 손에 저는 붙잡힐테니까요
- 월남에의 기억.1 -(일부)
총성이 울리면 쓰러지는 것은 사상이 아니다 나의 심장을 향해 총을 겨누고 상처를 입힌 것은 얼굴이 누렇고 키가 작은 아시아인, 그러나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나에게 적이 되는지 사상과 인간과의 함수관계는 무엇이 되는지
- 월남에의 기억. 4 -
멸망하여 버린 민족들의 최루가 어떻게 하여 아름다움이 되는가를 무너진 페탑 아래서 나는 알았다. 키 작은 고대 남방인들이 탑을 쌓아 올리고, 완성된 탑 아래 모여 축제를 벌이고, 북방민족의 말발굽 아래 탑이 무너지고, 무너진 탑에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그리하여 인간의 의지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오랜 소리를 페탑 아래서 나는 들었다. 나에게도 하나의 탑은 있었다. 은혜를 받고, 또한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하여 쌓아올린 탑이 있었다. 나의 탑을 무너뜨린 것이 무엇인가를 구태여 알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의 내부에 자연이 되어 서 있는 페탑에서 처음으로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뿐
- 不眠의 밤에 - (일부)
귀에 파란 불을 켜면 들린다 어둠의 중심에 은밀한 곳에 묻힌 나를 케내는 소리 또 들린다. 밤에만 가장 아름답게 모습을 바꾸는 것들의 가령 헐벗은 나무에 숨어 있던 정령들의 빛나는 치장의 소리
모든 죽은 것들은 바람 끝에 매달려 살아오는 숲속의 변화 붉게 않는 꽃이 그의 순수한 가슴을 열 때 꽃씨를 심는 나의 유년은 살아나고 그 이득한 시간에 너마져, 나는 밝은 불면을, 불면을 갖는다.
좀 더 맑게 들려오는 묻힌 나를 캐내는 소리. 몇 줄기 이슬이 되어 숲 속에 소리가 내리고 소리를 먹다가 먹다가 끝내 정령들은 그들 생전의 착한 모습으로 나무며 풀 혹은 가까운 바위 아무데서나 피어난다. 꽃의 가슴에서 뛰쳐나와 나의 유년도 함게 피어난다.
회사 서고에 꽃힌 3권의 시집 중 두 번쨰... 점점 예전에 알고 지내던 이름의 시인이 없다.. 그들도 밥벌이가 힘든지..산문으로 소설로 가고...새로운 시인들의 이름은 낯설다. 심한 경우 추천사를 써 준 시인도 모르겠다니..으흡 뭐든지 꾸준한게 좋다..시 읽는 것 조차도
- 후회의 방식 -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분명하다. 달리는 기차에 뛰어든 시간은 더이상 가지 않는다 으깨어진 핏덩이와 뼈가 허공에 박혀 정지된 플랫폼을 유령처럼 돌아본다. 돌아가고 싶다. 목구멍에서 터널 같은 빛이 터져 나온다 뢴트겐 차창을 딛고 기차는 역에서 거꾸로 멀여져간다. 기적 소리를 비벼끈 꽁초가 손가락 사이 불빛으로 켜질 때 살아 눈뜬 것이 죽음보다 외롭다 한밤중 삼킨 수면제가 한 운큼 손바닥에 뱉어지고 물과 파편이 솟구쳐 책상 위 유리컵으로 뭉쳐진다. 어깨를 입은 외투는 캄캄한 밤길을 지나 저녁 어스름까지 데려다준다. 수면제를 건네받은 약사가 수상한 처방을 뒷걸음으로 떼어온다 영안실 흰 천에 덮인 당신이 거실로 옮겨지고 비닐에서 피 묻은 칼을 꺼낸 감식반은 출입금지 테이프를 마저 철거한다 삐끗한 발목으로 창을 넘는 손이 떨린다 당신의 가슴에서 칼을 뽑자 턱에 맺인 눈물이 뺨을 타올라 눈에 스민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창백한 얼굴 당신에게 어떻게 용서될 수 있나 기차의 굉음이 레일에서 급히 멈춰 섰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다가온다 나는 마지막으로 공중에서 허공을 찢는 호각 소리를 듣는다.
아무도 눕지 않은 깊은 밤, 주검 곁에서 일어난 가난한 마음이 켜고 있는 불을 보아라 한 마음이 다른 마음을 위하여 숨 죽이며 켜고 있는 불을 보아라 이 밤이 지샐 때까지, 고요 뒤에 노리고 선 첩첩의 눈이 뚫릴 때까지 돌에 눌린 가슴을 찾아 이웃에서 이웃으로 몰래몰래 깜빡이는 한 사람의 새벽 불을 모아라.
- 이름 -
밤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누군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때 잠시라도 잊었을 때 채찍 아래서 우리를 부르는 뜨거운 소리를 듣는다.
이 밤이 깊어갈수록 우리는 누구에게도 가야 한다. 우리가 가기를 멈췄을 때 혹은 가기를 포기 했을 때 칼자욱을 딛고서 오는 그이의 아픈 발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누구인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로 가야 한다. 대낮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 형제의 찬 손일지라도
언젠가는 피가 돌아 고향의 논둑을 더듬는 다른 날선 낫이 될지라도 오는 조인 목을 뽑아 우리는 그에게로 가야만 한다 부르다가 쓰러져 그의 돌이 되기 위해 가다가 멈춰 서서 그의 짐승이 되기 위해
- 갈 길 -
가야 할 길은 하나 등 뒤에 쓰러진 벗들, 발목을 붙들고 같이가자 소리쳐도 뿌리치고 걸어야 할 길은 하나 저 태양소리 없는 눈을 뒤집어 쓰고 까무러치는 곳 돌덩이 같은 달 파랗게 박힌 하늘로 지평선으로
부러진 팔 쓰린 눈으로 더듬어 찾아야 할 것은 하나 움켜쥐고 낯 비벼야 할 건은 하나 웃음으로 잠들어야 할 것은 하나 거기에 가서
목메이게 불러야 할 것은 하나 흔들어야 할 깃발은 하나 싸움이 끝난 땅에서 칼날이 잠든 땅에서
그러나 이내 걸어야 할 길 숨 막힌 방 쪽을 뚫고 갑옷을 뚫고 가야 할 길은 천리 함께 걸어야 할 그리움에 몸부림 치는 이름없는 벗들 못내 떨치고 가야 할 길은 만리
어머니는 우리들 앞에서, 종종, 느그 아부지는, 하고 말을 잇지 못할 때가 있다.
그'아부지'라는 말에는 너무나 괜찮은 세월이 들어 있다.
- 109-5 -
치열하게 싸운 자는
敵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
지긋지긋한 집구석
- 144 -
샛별아
이 밤길을 너는 먼저 달려가 새벽 산길을 비추고 있거라
이 어둠 저편 누가 플래시를 버르장머리 없이 비추며 본다
두려워 말라, 그도 우리를 두려워 하고 있을 것이다.
어둠 자체가 무서운 것은 아니다.
무서운 것은, 다가오는 물체를 크게 보는 내 마음 속에 있다.
네가 자라서 너의 미래로 가는 길목에서 몇 차례
불심검문을 당하고 굴욕을 통과하여 더 탄탄해진
네 길을 갈 때 너도 알게 되리라
쉽게 승리에 도취되지 않고 먼 새별 산정에 이르는 길을.
- 18 -
수 많은 "너" 안에서 나는 "나"를 증언하게 된다.
너를 찾아서 명동 유흥가를 지나갔었다.
신흥 시가지 좋은 집들 사이사이에
아, 나는 황토에 부리 박은 옥수수나무 몇 그루를 본다.
머리로 갔느냐, 너, 원주민이여?
거기 사람 있으면 소리 지르고 나오시오
대답 없고
옥수수 나무만이 털을 꺼내놓고 靑?色의 개마고원으로 옮겨 간다
살아 있으세요. 그리운 당신
- 1.-
꼬박 밤을 지낸 자만이 새벽을 볼 수 있다.
보리, 저 황홀한 지평선을 !
우리의 새날이다
만세
나는 너다
만세 만세
너는 나다
우리는 全體다
성냥개비로 이은 별자리도 다 탔다.
흘러가도 한참은 흘러갔을 것이다.
하늘을 맴돌던 구름은 풀시들을 터뜨리고
마냥 부는 것은 바람을 안고 서서
짊어지던 모랫짐도 시멘트도
푹 퍼진 국수 한 그릇 막걸리 한사발에 허리를 푸는 인생들
씻어도 씻어지지 않는 상처만 눈을 흘기는 자리
죽은 살점을 떼어내며
지나간 시간에 대한 미련은 무엇일까
소장이 돌아와
어젯밤 울분으로 팽개친 반도를 세며
부족한 일당해 대해 설명이 없는데
우리는 그저 맹복적인 인간으로 돌아서서
쉽게 오늘을 용서하고
뼈저리게 내일만 꿈꿀 것인가
일어서지 못하는 다리여
외치지 못하는 가슴이여
뭉치지 못하는 노동자여
내일은 또 누구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
어둠은 끝없고 사랑도 끝이 없어
땅을 치면 우는 것은 미칠것 같은 가슴 뿐
텅빈 벌판 추운 공사장에
언젠간 일이 되고 백이 되고 천이 된
터질 것 같은 사람 하나뿐
-유성댁 -
하느님은
카빌라에 석가를 보내셨고
이스라엘에 예수를 보내신 일은 성공한 일이었으나
한반도에 광란의 인간을 창조하게 되는
부작용을 초래했고
어둡고 무더운 여름날
한반도 숨은 농촌 구석에
45킬로 얇고 여린 천사 유성댁을 보낸
상제님은 큰 실수를 하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농사의 고통을 깨닫고
부산낙원 서울낙원 일본낙원 미국낙원
돈낙원 섹스낙원...등지로 떠나게 하였으니
다행입니다 그려
상제님이 보내신 천사일 줄 모르고
곱게 기르신 부모는 순박하여
농촌구석에 시집 보낸 실수를 하셔서
술망둥이 만나 촌구석에 사람의 아들 딸을
가르치고 길러서 모두 떠나버린 뒷모습을
눈이 시도록 팔자에 심으며
비쩍 마른 몸뚱이에
십자가보다 고통스런 지게를 맞춰
나락,퇴비, 보리, 나무 등을 져 날랐습니다
불송이가 되어가던 고추밭을 매다가
자꾸만 하늘이 빙빙 돌고 캄캄해져
밭둑에 기어나와 멍하니 눈을 감고 앉았다가
반쯤 쓰러져 하늘을 쳐다보던 오늘 낮엔
상제님이 미웠고 부모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어둠이 내리고 꺼질 것 같은 불빛 아래
반장이 농작물 경작량을 조사해 간 후
허깨비 같은 유성댁을
탁 넘어뜨려 자망을 했습니다
정신차려 일어섰다가
다시 그 검은 물체에 떠받혀 자망을 했습니다
비가 내리고, 전라남도 공문서 뒷면
끊일 수 없는 검은 점 속에서
정숙이가 울고 있다.
어디로 갔는지 그녀의 만년필
진달래가 붉게 붉게 울고 있다.
비에 젖어. 어제는
지방 인부들과 술에 젖어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를 부르고
결리는 몸으로 악을 쓰며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도 멈추지 않던 비는
정숙이 눈물 위에 ‘부친위독속래요망’
뜨거운 슬픔 한 통을 더 전해준다.
불러라. 목이 터지도록 눈물로 불러
XXX을 존경한다는 총무를 묵사발 내고
한국사람은 좆나게 까야 말을 듣는다는 소장을 두고
놈의 면상보다는...... 방바닥을 내리쳐, 멍이 들도록
가슴을 쥐어 뜯으며, 뜯으며, 뜯으며
발가락이 잘린 최목수도 머리 센 이목수도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진저리나게 하는가
알 수 없다. 가야 할 길에 서서 모처럼
부끄러움 떨쳐버리고 고통마저 사랑하는
이 길에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고
어둡고 거대한 벽들이 초라한 목숨 앞에 우뚝 서서
덩치를 키우는데
호남선 완행열차마저 몸을 싣지 못한
오늘을 알 수 없다. 함바 앞 강선 위에
처참하게 죽어가던 아우의
체온만이 취기 속에 다시 살아나고 지금은
망치도 함마도 데꼬도 녹슬고 있다.
비는 끝없고 전라남도 공문서 뒷면
끊일 수 없는 검은 점 속
정숙이 울음 위에 노동의 피가 끊어
산천에 훨훨 진달래는 미쳐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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