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제목 : KAMIKAZE TAXI
제 작: 1995년,  140분(완전판 169분)
감 독 : 하라도 마사토(原田眞人)
각 본 : 하라도 마사토(原田眞人)

출 연: 야쿠쇼 코지(役所廣司)
,        타카하시 카즈야(高橋和也)
,        카타오카 레이코(片岡礼子)
         나이토 타케토시(内藤武敏)
         야지마 켄이치(矢島健一)
         믹키 커티스(ミッキー カーチス)
         타구치 토모로오(田口トモロヲ)
         네기시 토시에(根岸とし江)
         시오야 토시(塩屋俊)
 
음 악 :  카와사키 마사히로(川崎真弘)

조직을 배신해 야쿠자로부터 도망하는 남자 타츠오는 가까스로 택시를 잡아타고는 조금은 안심하게 된다. 이 택시를 운전하는 운전수는 페루에 이민갔다가 일본으로 돌아와 택시를 몰며 생계를 유지하는 칸다케. 칸다케는 오랜동안 일본에서 떨어져 살아 일본어는 물론, 일본의 지리도 서툰 탓에 이 둘은 몇몇의 대화를 주고 받으며 승객과 운전수 치고는 꽤 긴 인간관계를 트게 된다. 도망가는 남자와 그 남자의 도움을 받으며 운전하는 운전수, 어느새 이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면서 영화 <카미카제 택시>는 시작이 된다.  

한 명은 도망을 다니면서 느끼게 되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나누는 상대로, 다른 한명은 그와의 느닷없는 여행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여행같은 도주는 그들을 따르는 야쿠자들에 의해 더욱 더 속도가 빨라 지게 되고 이들이 탄 택시의 속도도 이와 함께 빨라지면서 영화의 속도도 긴박감을 더해 가는 이 영화는 1995년 제작된 작품으로 국내에는 1998년 제 2회 부천 영화제를 통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영이 된 적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야쿠자로부터 도주하는 한 남자 이야기 속에 사회성 짙은 영화적인 아이콘들이 극의 사실성을 살리고 있는 작품으로 각각의 캐릭터 들이 영화의 속도감에 따라 더욱 더 빛나는 것이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일본계 이민 노동자들의 이야기(영화 도입부의 다큐멘터식의 접근은 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더 자극한다.), 일본의 세계 대전 참여, 여성문제, 야쿠자를 비롯한 일본내의 부페상 등 영화 곳곳에는 단순히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독 하라도 마사토가 일본인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로 가득해 감독의 정치적인 성향도 엿 볼 수 있게 한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이야기 구조와 일본적인 직업을 가진 캐릭터들의 사실적인 묘사 이외에도 이 영화는 독특한 매력을 많이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하라도 마사토와 같이 작업을 많이 한 베테랑 배우 중 하나인 배우 야쿠쇼 코지가 보여주는 연기는 이 영화의 백미를 드러내 준다. 택시를 세워두고 안데스의 피리를 부는 모습은 겉멋을 지닌 주인공의 매력을 서정적인 감성으로 가득 채워주며, 일본의 부폐를 처단하기 위해 야구망망이를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그의 모습은 현대의 전사로서 손색이 전혀 없는 모습으로 <글래디에이터>의 러셀 크러우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런 야쿠쇼 코지의 영화적인 매력 역시도 타이트 하면서도 빠른 전개를 보여주는 하라도 마사토의 연출력에 의해 그 가치가 빛난다. 영화의 매력 이외에도 다른 의미에서는 상업영화에서 영화가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독특하다. 두 시간이 훌쩍 넘는 긴 상영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거나 고답적이지 않으며,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담고있어서 하라도 마사토 감독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품으로 이 영화를 보는 많은 이들에게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수작임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인생에 큰 의미를 던지는 화두는 아니지만, 극적 구성에 의해 영화적인 재미를 충분히 살리고 있는 '가미가제 택시 Kamikaze Taxi'에 한번쯤은 타 볼만하다고 자신있게 이 택시의 콜 번호를 알려주고 싶니다. 그 택시 안에서는 안데스 피리와 야구방망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보여주는 인간사의 일면을 볼 수 있으며, 그 택시에서 내릴 땐 저절로 시원한 웃음을 얻게 된다. 영화적인 결말이 조금은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그리 낙심할 수준은 아니다. 그 택시를 타고 있었던 여행은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것이며, 그 택시를 몰던 운전수는 배우로, 영화 속의 한 캐릭터로 오랜동안 기억을 지배할 것이다. 드라마와 캐릭터가 살아있는 그 안에 삶에 대한 작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박력넘치는 영화를 만나기란 그다지 쉬운일이 아닌데 이 영화는 그런 행운은 느끼게 한다.
by kinolife 2006. 10. 30.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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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제목 : Jubaku: Spellbound
1999년, 115분, Color
감 독 : 하라다 마사토(原田眞人)
각 본 : 타카스기 료(高杉良)
          스즈키 사토루(鈴木智)
          키노시타 무기타(木下麦太)
원 작 : 타카스기 료(高杉良)

출 연 : 야쿠쇼 코지(役所廣司)
          나카다이 테츠야(仲代達矢)
          시이나 킷페이(椎名桔平)
          야지마 겐이치(矢島建一)
          나카무라 이쿠지(中村育二)
          와카무라 마유미(若村麻由美)
          후부키 준(風吹ジュン) 
          타키가와 유미(多岐川裕美)
          네즈 진파치(根津甚八)
          사토 케이(佐藤慶)
          이시바시 렌지(石橋蓮司)
          엔도 켄이치(遠藤憲一)
          모타이 마사코(もたいまさこ)
          혼다 히로타로(本田博太郎)
          우메노 야스키요(梅野泰靖)
          코바야시 카츠히코(小林勝彦)  
          야마모토 키요시(山本清)
          카츠베 노부유키(勝部演之)
          와카마츠 타케시(若松武史)
          쿠로키 히토미(黒木瞳)
          나이토 타케토시(内藤武敏)  
          야마사키 세이스케(山崎清介)  
          오오타카 히로오(大高洋夫)  
          오오니시 토모코(大西智子)  
          키노시타 호우카(木下ほうか)  
          키시 히로유키(岸博之)  
          타구치 토모로오(田口トモロヲ)  
          무라카미 준(村上淳)  
          모토미야 야스카제(本宮泰風)  
          타카스기 료(高杉良)  
          유진(遊人)  
          코모토 쿄이치(古本恭一)  
          이마이 아즈사(今井あずさ)  
          오오시로 에이지(大城英司)  
          다이몬 슈조(大門修三)  
          나카무라 료(中村亮)  
          우메자와 켄스케(梅沢健祐)  
          나미키 시로(並樹史朗)  
          타테 고타(殺陣剛太)  
          이노우에 하지메(井上肇)  
          미즈카미 류시(水上竜士)  
          미츠오카 유타로(光岡湧太郎)  
          카토 미츠루(加藤満)  
          아오키 테츠진(青木鉄仁)  
          요시이에 아키히토(吉家明仁)  
          혼고 겐(本郷弦)  
          미우라 하루마(三浦春馬)  
          오오타니 레이나(大谷玲凪)  
          마치다 마사노리(町田政則)  
          요시자키 노리코(吉崎典子)

음 악 : 카와사키 마사히로(川崎真弘)

언젠가 우리 나라에서 일본을 비방하는, 아니 일본의 속을 들여다본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단점들으 재미삼아 씹던 때가 있었다. 전여옥의 베스트셀러 [일본은 없다]에서부터 시작된 일본의 단점 헤집기는 그 비슷한 소재를 다룬 수십권의 책들이 출판되면서 논쟁의 소재과 되고 서점가에서는 유행의 정점이 된 것이었다.

그 이후, 2001년 봄에는 일본 스스로가 그런 소재를 가지고 쓴 소설이 모티브가 된 영화 한편을 국내 극장에서 만날 수가 있다. 소설을 쓰기만 하면 서점가를 긴장시킨다는 미국의 소설가 존 그리샴처럼 일본의 서점가를 들뜨게 하는 작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다카스키 료(高杉 良). 그의 소설 [금융부식열도]는 출간되자마자 출판사의 예측대로 빅 히트를 기록하며 서점가를 휩쓸고 뒤이어 하라다 마사토(原田眞人)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다. 제목하여 <쥬바쿠:금융부식열도> .

영화 <주바쿠>를 만든 하라다 마사토 감독은 <카미가제 택시><바운스>등을 통해 일본의 부폐를 소재로 수준 높은 상업영화를 만들어 온 감독이다. <카미가제 택시>가  일본의 과거 정치계의 부폐를 다루고 있다면 영화 <바운스>는 일본의 십대들을 통해 현재 일본 성문화의 실태와 어른들의 비뚤어진 인생관을 비꼬고 있는 작품이. 그래서 1999년에 그가 선보인 영화 <쥬바쿠-금융부식열도>는 일본의 금융계의 비리를 소재로 하고 있다니 그의 날카로운 영화감각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주바쿠> 역시 상업영화의 틀 속에서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긴장감과 사실감을 놓지치는 않는다. 금융계와 정치, 그리고 이들과 연결고리를 놓고 있지 않는 야쿠자의 공포까지 영화 곳곳에는 부폐의 연결고리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물론 전작에 비해 긴장감이나 문학적 혹은 영화적인 드라마 전개는 지루함이라는 또 다른 복병 앞에서 쓰러져 안따까운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야큐쇼 코지와의 작업을 통한 균형을 깨트리지 않는 미덕만은 챙긴다. 평범한 은행원으로 출연한 야큐쇼 코지는 하라다 마사토의 영화에서는 평범함에서 시작해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로 등장했는데 이번 영화 역시 그의 영화에 걸맞는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바쿠(JUBAKU)'란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나 신비로운 힘에 사로잡힌다는 뜻을 가진 단어, 그렇다면 영화 속의 주인공인 기타노(야큐쇼 코지)는 금융계 내에서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어떠한 틀 속의 비리에 연루된다는 뜻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보기 전에 이미 제목에서 부터 음모와 암투라는 영화적인 흥미는 충분히 안고 있는 셈이 되며 그 암투가 어떤 결말을 향해 가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관객의 또 다른 즐거움일 테다.

일본의 거대함, 그 속에서 최고의 금융계 속에 걸린 덫, 어느 자본주의에서나 볼 수 있는 불법대출과 이에 따르는 해당 은행의 공신력 추락과 은행자체 존립에 대한 불안 등은 영화의 기초적인 문법에 해당되는 영화적인 존재이며, 그 사실을 모르는 은행원들은 자신이 다니던 회사의 부폐에 경악하는 것은 영화의 사건이 된다. 그리고 그 부폐의 시작이 자신이 믿고 있던 선배며 동료였으며, 그도 아닌 이들은 자신의 허물도 모른채 하루하루를 살던 바보에 불과했다는 점은 영화의 철학과 닿아있기도 하다. 부폐를 만드는 자, 알면서도 묵과하는 자, 무엇이 부폐였는지도 인식 못하는 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게 된 후, 이를 변화시키려는 자, 영화 속의 사람들은 각각의 선택적인 방향 앞에서 쉽게 방관자과 되고 그래서 또 쉽게 패배자가 되는 단계에 대해 철저히 냉정한 시선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영화 <주바쿠>속에서의 악은 강하지 못한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정서이며, 이는 곳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우울한 잔상을 남긴다. 이 영화 속에서도 소재가 단지 금융계이지 악과 선의 기준이 바뀐다거나 인생이 변화한다거나 하는 큰 변화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전의 영화에 비해 <주바쿠> 안에서 그가 지적하고 있는 ‘악’의 실체가 깊게 다가오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는 아따까움까지 엄습한다. 마치 녹이 쓴 펜으로 옛날 이야기를 끄적이듯 충격적이지도, 새롭지도 않게 이야기와 우인공들의 무대만 옮겨왔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에 있었다는 금융계의 부폐를 실제 몸으로 느껴보지 못한 우리로서는 영화속의 재미에만 의존해 이 영화를 평가해볼 때 그저그런, 그냥 실패한 상업영화 쯤으로 보이게 한다는 거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단지 그가 건드리고 있는 소재가 다큐멘터리적인 그의 카메라에 의해 진지한듯 보일 뿐, 영화적인 재미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현재 일본의 문제가 영화 속에서 재미가 된다니….마치 이런 문구를 암시하는 듯. '우리 모두는 썩어가도 영화는 만들거다. 그것이 영화의 소재가 되는 것이다. 사회는 썩어가도…영화는 만들어질 뿐이지', 일본만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 속의 악이 들춰진다는 점에서 조금은 씁쓸함을 느낀다. 아! 누구는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영화가 재미없기 때문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반복해서 생각을 하다보니 쓸쓸함의 근저에는 다른 어떤 구체적인 이유보다도, 영화가 재미없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더욱 더 커지는 것 같다.  

by kinolife 2006. 10. 14. 21:48
소설
글:와타나베 준이치(渡邊淳一)
니혼게이자이신문 조간에 1995년 9월부터 다음 해 10월까지 연재
출판년도:1995년
영화
감독: 모리타 요시미츠(森田芳光)
주연 : 야쿠쇼 코지(役所廣司)
         구로키 히토미(黑木瞳)
제작년도:1997년


1997년 또는 98년인가 국내에서 보기 힘들었던 일본 영화들을 복사 테이프로 보곤 하던 때 모리따 요시미츠의 영화 <실낙원>은 꽤 깊은 인상을 남겨 줬었다. 일단 야하다는 소문과는 달리 가릴부분은 잘 가리면서 사실적으로 성묘사를 표현했던 감독이 연출이 고급스러웠다는 기억이 제일 먼저 난다. 그 당시엔 야하기도 참 야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최근 들어 다시 봤더니 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위의 장면은 없었다. 역시 시간은 심장을 무디게 하고 눈을 어둡게 하는 걸일까? 물론 5-6년의 시간 동안 더 외설적인 문화들을 접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두 번에 5년 동안 두 번에 걸쳐 영화를 보고 작년에 헌책방에서 구한 책으로 번역된 소설까지 읽고 나서 이 작품 '실낙원'은 영화는 범작 이상, 소설은 수작이하라는 애매한 성적표가 매겨진다. 소설과 영화 모두 문학적으로, 영화적으로 각각의 가치가 있겠지만, 역시 영화는 스토리에 강하고 소설은 주인공의 심리 묘사에 강하다는 느낌이다.

먼저 영화는 두 남녀 주인공이 만나게 되고 사랑이 생기게 되고 나아가서 서로의 성감을 느끼면서 서로의 육체에 빠져들면서 깊어지는 관계에 대한 묘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이들의 사랑은 그 시작이 각자 결혼 이후의 상태임을 생각할 때, 관계를 가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가졌느냐에 관심의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관계를 가지는 장소나 상황에 대한 묘사가 깊어지는 관계와 성 행위에 대한 수위를 짐작케 하는 형식으로 보여지게 된다. 이와 함께 이러한 이들의 변화에 대한 주변 인물들과의 마찰 혹은 행동이 이 둘에게 끼치는 영향성에 대한 문제들이다. 깊어지는 관계 만큼이나 그들의 생활은 자연스럽게 변화했고, 그러한 변화들은 관계의 정점에 있는 이 둘에게 끝이 보이는 터널 속으로 밀어넣게 한다.

영화가 두 인물의 성 묘사에 날카로운 카메라를 속삭인다면 소설은 주인공들의 내면 세계 그 중에서도 여자 주인공의 심리 변화, 또 그에 따르는 남자 주인공의 해석들이 이들의 관계변화를 자연스럽게 이해 할 수 있게 한다. 특히 글 중간 중간에 보여지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규정짓는 듯한 내용, 이른바, 남자는 여자를 즐겁게 해 주었을 때 가치는 얻는 다는 점에서 사랑에 있어서의 승리자 혹은 주된 권한은 여자가 가지고 있다는 작가의 해설은 마치 동물의 왕국에서 보여지는 교미기의 동물의 자태와 인간의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남녀의 관계 속에 숨겨진 원초적인 원리는 그러한 시스템에 있음을 수 많은 독백에 의해 반복,주시한다. 역시 사랑의 의미에서 외부적인 힘과는 달리 '성행위'에서의 우위에 대해서는 철저히 여성에게 무게를 주는 작가의 시선을 지극히 세심하면서도 감정적이지만, 적지 않은 신선함으로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가 많은 성묘사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박하지 않으며 또 가볍지도 않게 한다. 남녀의 관계 그 중에서도 성에 대해 궁금해 함에도 이 소설 속에서의 성은 진지한 궁극에 다달아 있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진정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남녀의 짙고 짙은 패륜을 다루고 있음에도 쉽게 3류 소설로 치부할 수 없게 한다.  

역시 이 작품에 있어서 소설은 각 인물들의 심리묘사에 초점을...그리고 영화는 그들의 행위를 통한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데 있어 각각의 묘미가 영화는 영화대로 원작 소설은 원작 소설대로 살아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전체적으로 인물들의 감정을 전해주는 부분에 있어서는 역시 소설이 더 섬세하지만, 머리 속을 채우는 몇몇의 영화장면들은 책을 접했을 때의 사실성이나 자세함 만큼이나 강렬하게 남아 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지는 시체 검술 보고서는 소설의 설명보다 더 강렬한 문학적 효과를 영화 속에서 전해 준다는 점에서 수작인 원작 소설을 영화로 옮겨진 작품 역시도 원작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감독의 역량이 적당한 선에서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실낙원>이라는 작품은 사랑과 육체의 의미를 이만큼 솔직하고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천박하지 않다는 점에서 책과 영화 모두를 권해도 아깝지 않은 작품이다.

by kinolife 2006. 4. 18.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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