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 The French Lieutenan's Woman
글 : 존 파울즈(John Fowles)
번역 : 김석희 역
출판사 : 열린책들
2004년 05월

지루하게 해를 걸쳐서 읽게 되어버린 존 파울즈의 명성 어린 작품을 다 읽었을 땐, 재밌다 와 명작 이런 느낌보다 오랜 숙변을 제거했을 때의 느낌 혹은 긴 숙제를 마쳤을 때의 기쁨이 먼저 다가 왔다.

시대를 거슬러 조금은 답답한 기운을 전해주는 영국 신사들의 시대에 마음을 숨기고 살아가는 혹은 열정을 누르고, 욕망을 감추고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단상이 어찌나 갑갑하지만 진실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하룻밤의 추억...아니 기억...혹은 상처가 되어버린 걸 잊어버리지 못하는 남자와 역시 그것을 털어내 버린 여자와의 긴 기다림과 엇갈림, 오해와 이해가 이 빠른 시대에 적잖게 여운으로 남는다. 고루하고 고지식한 이들의 만남과 헤어짐이 지금 이 빠른 시대에 사는 나에게 와서 전해주는 건 무엇일까. 불분명하지만 진지한 시대가 적잖게 가슴에 페인다.


- 책 속의 글 -

"미래에 생겨날 비행기라든가 제트 엔진, 텔레비전, 레이더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듣더라도 놀라지는 않았겠지만, 시간을 대하는 세상 사람들의 태도가 변한 것을 알았더라면 분명 놀랐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기의 비극 사운데 하나는 시간 부족이다. 과학에 대한 사심 없는 열정이나 지혜 때문이 아니라 시간 자체에 대한 사고방식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독창성과 사회의 소득 가운데 큰 몫을, 일을 보다 신속하게 처리는 방법을 찾는데 투자하고 있다. 마치 인류의 궁긍적인 목적이 완전한 인간성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번갯불에 가까워지는 것이기나 한 것 처럼.그러나 찰스에게, 또한 시대. 사회적으로 그의 동료였던 사람들 대부분에게 존재를 지배하는 시간의 박자는 분명 <아다지오>였다. 문제는 한정된 시간 속에 하고 싶은 일을 모두 끼워 넣은 것이 아니라, 남아도는 여가의 드넓은 광장을 채우기 위해 일을 일부러 질질 끄는 것이었다. "

"앞으로 여러분은 찰스가 좀 더 높은 곳을 겨냥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지성을 가진 게으름뱅이들은 자신의 지성을 상대로,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하기위해 늘 그러는 법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바이런적 배출구. 즉 천재와 방탕한 기질은 전혀 없이. 다만 바이런적 권태만을 가지고 있었다."

"찰스, 나는 가장 장인한 사람의 눈에서도 그런 생각을 읽었다. 의무란 항아리에 불가한 것이다. 그건 가장 큰 악에서부터 가장 큰 선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들어오는 건 뭐든지 담고 있다."

"에술가가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심판자가 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예술가가 될 자격이 없다고 하더군요."

"다소 멜로드라마 같은 말투였다. 그러나 말보다는 그 뒤에 숨어 있는 감정의 깊이가 더 중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이 말은 찰스의 모든 존재와 절망에서 나온 말이었다."

"언어는 줄무늬 비단과 같아서, 보는 각도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

"신비로운 법칙과 신비로운 선택으로 이루어진 인생의 강물은 황량한 강둑을 지나 흘러간다. 그리고 또 다른 황량한 강둑을 따라서 찰스는 자신의 시체가 실린, 눈에 보이지 않는 상여를 뒤따라 가는 사람처럼 걷기 시작한다. 그는 임박한,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드디어 자신에 대한 믿음 한 조각, 그 위에 자기 존재를 세울 수 있는 진정한 고유성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비통하게 그것을 부인하려 하지만, 그리고 그의 눈에는 그 부인을 지지하는 눈물까지 고여 있지만, 그리고 사라가 어떤 면에서는 스핑크스 역할을 맡기에 유리한 점을 많이 갖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인생이란 결코 하나의 상징이 아니며, 수수께끼 놀이에서 한 번 틀렸다고 해서 끝장이 나는 것도 아니고, 인생은 하나의 얼굴로만 사는 것도 아니며, 주사위를 한번 던져서 원하는 눈이 나오지 않았다 해도 체념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깨닫기 시작했다. 도시의 냉혹한 심장으로 끌려 들어간 인생이 아무리 불충분하고 덧없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인생을 견뎌 내야 한다. 그리고 인생의 강물은 흘러간다. 다시 바다로, 사람들을 떼어 놓는 바다로. "
by kinolife 2007. 1. 25.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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