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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시영
출판사: 창작고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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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 2.500원
창비시선(010)

- 引火 -

아무도 눕지 않은 깊은 밤, 주검 곁에서 일어난
가난한 마음이 켜고 있는 불을 보아라
한 마음이 다른 마음을 위하여
숨 죽이며 켜고 있는 불을 보아라
이 밤이 지샐 때까지, 고요 뒤에 노리고 선
첩첩의 눈이 뚫릴 때까지
돌에 눌린 가슴을 찾아
이웃에서 이웃으로 몰래몰래 깜빡이는
한 사람의 새벽 불을 모아라.






- 이름 -

밤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누군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때
잠시라도 잊었을 때
채찍 아래서 우리를 부르는 뜨거운 소리를 듣는다.

이 밤이 깊어갈수록
우리는 누구에게도 가야 한다.
우리가 가기를 멈췄을 때
혹은 가기를 포기 했을 때
칼자욱을 딛고서 오는 그이의
아픈 발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누구인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로 가야 한다.
대낮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
형제의 찬 손일지라도

언젠가는 피가 돌아
고향의 논둑을 더듬는 다른 날선 낫이 될지라도
오는 조인 목을 뽑아
우리는 그에게로 가야만 한다
부르다가 쓰러져 그의 돌이 되기 위해
가다가 멈춰 서서 그의 짐승이 되기 위해

 - 갈 길 -

가야 할 길은 하나
등 뒤에 쓰러진 벗들, 발목을 붙들고
같이가자 소리쳐도
뿌리치고 걸어야 할 길은 하나
저 태양소리 없는 눈을 뒤집어 쓰고
까무러치는 곳
돌덩이 같은 달 파랗게 박힌 하늘로
지평선으로

부러진 팔 쓰린 눈으로
더듬어 찾아야 할 것은 하나
움켜쥐고 낯 비벼야 할 건은 하나
웃음으로 잠들어야 할 것은 하나
거기에 가서

목메이게 불러야 할 것은 하나
흔들어야 할 깃발은 하나
싸움이 끝난 땅에서
칼날이 잠든 땅에서

그러나 이내 걸어야 할 길
숨 막힌 방 쪽을 뚫고
갑옷을 뚫고
가야 할 길은 천리
함께 걸어야 할 그리움에
몸부림 치는 이름없는 벗들
못내 떨치고 가야 할 길은 만리
                              
by kinolife 2007. 1. 24. 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