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한국, 112분

감독: 박제현
출연: 김정은
       김상경
       오승현
       
연애를 하다 보면 (해 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 좋던 연애의 절정이 지나자마자 연애를 하기 이전과 크게 달라진게 없다고 느끼거나 심한 경우엔 눈에 띄게 불편한 일상만이 발견되게 된다. 이른바 긴장감이 떨어져 나가버리는 일상의 연애란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버리거나 거추장스러운 악세사리처럼 불편할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긴장감 없는 연애에 불을 댕기는 것은 결혼이라는 화려한 결말을 만들거나, 연애 중인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에게 제 3의 인물의 등장해 이 식어가는 관계에 질투라는 양념이 들어가 또다시 눈에 불을 켜게 할 때이다. 영화 <내 남자의 로맨스>는 후자에 관한 이야기를 거쳐 전자의 결말로 향해가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이다. 위기를 거쳐 행복한 결말에 다다르기 위해 달려가는(마치 이 결말을 위해 위기가 있었다는 듯) 이 영화 역시 오랫동안 냄새 날 정도로 쿰쿰한 연애가 결국은 뉴페이스를 몰아낸다는 영화 속의 착한 연애학이 가진 일반 방정식을 따라간다. 영화를 다 본 지금도 영화 속의 주인공 처럼 많은 사람들이 영화 속의 선택을 감행할지는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이 착한 연애는 순진한 관객들을 배신하지는 않는다.
연애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7"이라는 숫자는 갈때까지 갔다는 것을 증명하는 불운한 숫자이다. 7년이 넘도록 결혼을 하지 않은 커플이란 역시 결혼을 하기엔 무리수가 있는 사이라는 증거인 수도 있다. 혹은 연애하는 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편안하다 못해 무덤덤해진 커플들은 그 편안 일상 같은 생활에 염증을 느껴 스스로의 위기를 향해 달려가라고 속삭이는 숫자인지도 모른다. 영화 <내 남자의 로맨스>의 주인공 현주 역시도 7년 동안의 연애를 통해 변함없이 소훈의 프로포즈만을 기다린다. 정말 영화속에 표현된 엽기적인 공주처럼, 가만히 앉아서 마냥 기다린다. 그런 그녀에게 사랑은 싸워서 가지는 것이고 노력해서 얻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게 바로 뻔하디 뻔한 연적이다(아 상대방의 불치병도 있을 수 있는데, 이건 좀 현실적으로 발현될 %가 낮은 이유이다.). 살다가 직접 맞닥트리진 않아도 많이 보게 되는 장면,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 연적이 연예인이라는 설정이 보다 영화적인 흥미를 돋구지만 일반적으로 연적이란 당사자의 정신적 흔들림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봤을 때, 그 상대가 연예인이든 아니든 그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법이다. 이렇게 내 애인의 또 다른 로맨스는 나의 눈물의 재료가 된다. 서러운 육체의 알수 없는 기폭제. 이 눈물은 두말 할 것 없이 그저 서러운 법이다.

아주 평범한 줄거리에 평이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영화의 매력은 오래된 연인을 밀고 땡기기가 아니라 영화 속 주인공 현주에게 제 3의 인생동반자이자 양념인 친구들의 면모들이다. 이들 친구들이 보여주는 일상적인 생활이 주는 단초로운 즐거움이다. 강북의 가난한 동네(하지만, 영화 속에 나오는 집은 아주 괜찮다.)의 한 빌딩에 꽃집, 만화가게, 비디오 가게 등을 같이 하며 모여사는 반백수 친구들의 일상은 미국의 TV 시트콤 <프렌즈>의 친두들만은 못하겠지만 그들만의 색깔을 가진 공동체로서 훌륭하다. 갓 스물을 넘어서면 특별히 불편할 것도, 나쁠 것도 없는 부모님의 집을 떠나 좀 더 자유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자유로움이래봐야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남자친구를 집에다 데려오고, 친구들이랑 야한 비디오 보고 싶고 머 이런게 다였지만, 그 자유를 즐기기 위해 독립이다 자취다 그런 생활을 해 본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들의 집은 유토피아 인지도 모르겠다. 역시 젊다 못해 어린 이들에겐 영화 속 이야기처럼 부자 아빠를 둔 친구가 있어야만 가능하겠지만.....

이런 이들 친구들 눈에 비친 현주는 사랑스럽고 미련한 친구이면서도 자신들 중에서 가장 착실하고 지고지순한 친구다. 물론 유일하게 남자 친구가 있고, 연애를 하는 친구이기도 하다. 친구를 괴롭히는 여자를 괴롭히기 위한 술자리에서 이내 스타의 후광에 빠져 친구들을 배신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 이전에 친구의 사랑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들뜨고 화내는 그렇게 솔직하고 순진한 이들이 현주의 친구들이다. 이런 친구들의 자잘한 이야기가 특별할 것 없는 로맨스 영화가 따뜻한 일상에 기대어 별 욕심없는 영화인 듯 비쳐지게 한다. 들뜨고 흥분하고 애태우지만 역시 사랑은 짜여진 운명 안의 스토리에 따라 내 배역이 정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때가 많다. 영화속의 현주도 자신의 사랑을 지키 위해 용기를 내면서도 비교적 자연스럽게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의 맥은 지루한 커플, 그들을 갈라놓고 사랑을 쟁취하고 싶은 제 3자라는 틀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연애라는 것도 독립된 자아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장치라는 걸 알 수 있다. 비교적 세 명의 주인공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스토리가 중심이지만 현주의 입장에서 사랑을 찾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찾아가는 여정에 더 큰 의미를 뒀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 이 영화는 다양한 장르를 어설프게 섭렵하고 있는 박제현 감독의 그저 그런 프로젝트 로맨스 영화이다. 하지만 그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에 자잘한 재미를 주는 건 현주역을 맡은 김정은의 표정연기이고, 또 떄론 독이 되기 쉬운 김정은의 표정연기가 독주할 수 없도록 막는 친구들의 만화같은 캐릭터가 주는 조율의 묘미이다. 영화 <내 남자의 로맨스> 속의 사랑 이야기는 웰메이튼 수준에도 못 미치지만 풋풋하게 웃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다행이다 싶다.
by kinolife 2006. 10. 22. 14:20

2002년, 미국, 114분

감독: 피터 패럴리 (Peter Farrelly), 바비 패럴리 (Bobby Farrelly)
출연: 잭 블랙 (Jack Black)
       기네스 팰트로우 (Gwyneth Paltrow)
       제이슨 알렉산더 (Jason Alexander)
       조 비터렐리 (Joe Viterelli)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 소년은 두려움과 슬픔으로 잠긴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목사 아버지는(왜 하필 아버지의 직업이 목사인지, 패럴리 형제의 취향이 드러난다.) Hot한 여자를 만나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한다. 그런 아버지의 심전도가 제로가 되는 시점에서 시작되는 영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Shallow Hal>는 남성이 여성의 외모에 심취하게 되는 과정과 그런 남성의 행태에 상처받는 혹은 사랑받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재미있는 코미디 영화이다. 물론 사랑에는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는 원론을 설명하는 영화이지만 패럴리 형제는 결코 주제를 비켜가거나 우회하지 않는다. 직설적인 방법으로 표현된 이 단순한 주제의 영화는 정말이지 자신의 진짜 짝 찾기에 대한 단순한 해법을 보여준다.

어느 곳에서나 변함없는 진리겠지만 여자는 이쁘고 볼 일이다. 순박함이 남아있는 지구촌의 어느 촌 구석이 아니고서야 남녀불문하고 자신을 뽑내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온갖수단을 다 발휘하는 자본주의의 현장에서 미모란 이성의 구애를 받기위해서는 너무 필요한 수단이다. 더군나에 영화 속의 할 처럼 아버지의 눈물어린 유언을 인생의 큰 명제로 담고 사는 이들에게 정말이지 Hot한 여자란 죽기전에 한번 정도는 거쳐야 되는 통과의례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어떤 남자가 이 즐거운 통과의례를 피해갈려고 할까! 영화 속의 할은 정말이지 남자들의 보편적인 희망을 절대희망으로 가진 평범한 남자인지도 모르겠다. 좀 과할 뿐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남자인 셈이다.

평범하게 이쁜여자를 밝혀도 사는게 힘든 법인데, 병적일 정도로 좋아한다니 정말이지 사는것 자체가 힘이 들 만하다. 번번히 데이트 한번 하기가 힘든 할의 욕구불만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걸 복선으로 알고서도 그저 웃어넘길 뿐 그렇게 심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역시 남자에게 있어 이성의 미모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심령가? 인기 최면술사 혹은 카운셀러 쯤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유명인과의 대화 이후 그의 여성관은 최면의 변화시기를 겪게 된다. 보통의 남자보다 심하게 여자의 외모에 의존하는 할, 문제가 있다고는 보지만 유방이 없는 여자와 뇌가 없는 여자 중에서 딱 부러지게 대답을 못하는 단계에서는 역시 변화의 혹은 반성의 최면시기가 필요해 보인다. 최면이라는 것이 자신이 모르는 자신안에 갇힌다는 점에서 엘리베이커 안의 좁은 공간에서의 변화는 무척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최면이후, 할은 자신이 그동안 무시했던 어글리 우먼들이 이뻐 보인다. 더군다나 그녀들에게 추파를 던지면 그녀들이 너무 좋아하니 정말 살맛나는 세상이다. 외모 지상주의와 최면으로 시작되는 영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는 어느새 헐리우드의 주연배우로 올라선 잭 블랙의 풍부한 표정연기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코미디 연기를 보여주는 기네스 펠트로우의 모습은 이 신선할 것 없는 영화에 활력소를 불어 넣으면서 제눈에 안경!이라는 연애의 법칙을 보여주는 상큼한 코미디다.



그런 그의 레이다 망에 들어온 로즈마리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이상형. 하지만 그건 그의 최면 안에서만 그렇다. 그래서 그와는 달리 정상인의 눈을 기진 할의 친구 마리시오의 눈에 비친 로즈마리는 말 그대로 쉣!...그러나 얼이 빠져 열심히 사랑을 하는 할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이상하다. 결국은 예전의 자신과 같이 여자를 평가하고 함께 나누던 친구 할을 돌려받고 싶은 마리시오는 할이 최면에 걸렸다는 기쁜 소식을 알고는 곧바로 그 최면에서 친구를 구해낸다. 그리고 최면에서 풀려난 할은 예전의 로즈마리에게 전화를 하지만, 방금 지나간 로즈마리를 구분 못 할 정도로 자신의 최면이전을 기억하지 못한다. 역시나~ 라는 생각으로 사랑에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힘이 빠진 로즈마리는 어쩌면 자신의 살이 아니라 자신 자체를 미워하면서 할을 미워하겠지만 사실은 자신 스스로가 미웠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겐 이성과의 교제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봉사에 메달리는(역시 굉장이 현실적이며 설득력이 있는 설정이다.) 로즈마리의 모습의 지구촌의 못생긴 여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한 자기 최면법인지도 모르겠다.

로즈마리의 실체에 눈을 뜬 아니, 자신의 최면시기를 알게 된 할에게 있어 로즈마리는 역시 '같이 있으면 좋은 여자'였다는 사랑의 기본수칙처럼 영화는 당연한 결과를 향해 간다. 하지만, 마치 채팅을 하다 마음이 맞아서라고 말하는 커플들 처럼 외모 이전의 서로가 먼저였던 커플들이야 말로 유방모다 뇌가 신체에서 더 중요하다는 당연한 답을 현실적으로 전해주는지 모른다. 바보같은 할은 최면을 겪고 자기를 밎지 못하는 과정을 거치고서야 자신이 페니스만 있고 뇌는 없었던 바보여서 뇌보다 유방을 더 중요시 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할이나 친구 마리시오 같은 남자들이야말로 자신의 여자에 대한 외모에 집착에 가까운 애착을 보이는 법이다. 마리시오의 꼬리뻐가 가진 비이성이 평범한 여자의 발가락을 협오스럽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첫인상, 외모는 이성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첫번째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연인이 가진 수 많은 것 중에서 얼굴이나 몸맵시를 평생의 즐거움의 수단 중 으뜸으로 생각할 땐 그 한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상대를 찾는데 더더욱 힘이 드는 법이다. 대부분의 사랑엔 설명이 어려운 호르몬이 흐르지 않나. 그 호르몬을 외모에 가두는 것은 참으로 우둔한 짓이 아닐 수 없다. 당차게 자신의 사랑을 만들고 지켜가는 똑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과 같은 우매한 최면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호르몬의 최면을 지키면서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by kinolife 2006. 10. 6. 23:30
2003년, 한국, 118분
감독: 장준환
출연: 신하균
       백윤식
       황정민
       이재용
       이주현
       기주봉


지구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지구의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벌써 맛이 가기 시작했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는 이런 고통 속에 몸부림 치는 지구와 그 위에서 발을 디디고 선 인간들의 문제를 희화화해 한국적 SF적 상상력을 총동원한 코미디 형식의 문제성 영화다. 영화 속에서 외계인들의 눈으로 비쳐지는 지구는 환경오염으로 얼룩진 죽은 땅이며, 전쟁과 폭압으로 얼룩진 비평화의 공간이며, 자본의 지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머니압박의 무중력 공간이다. 이런 불균등과 이기주의는 자기를 지키기는 커녕 스스로는 망가트리는 보이지 않는 압박이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더 없는 재앙이다. 역시 무지는 해결책이 없는 병이자, 죄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부수어야 한다. 더 배운이가 시작하고, 더 가진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자의식은 감독의 정신세계를 거쳐 영화 곳곳에 남아있는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감독 장준환은 이런 사회 의식을 황당하지만 신선미 넘치는 이야기로 풀어내며,결코 웃을 수 없는 지구 지킴이 병구와 순이를 통해 질문과 동시에 피해갈 수 없는 대답을 던져준다. 과연 이 영화 속의 질문과 감독의 대답을 피해 어떠한 개인적인 결론을 낼 수 있을까. 정말이지 병구마저 죽고 만 이 공간에서 살아남은 이는 지구를 지킬 수 없을까! 그렇게 미약한 인간들만이 남아 있는 것일까?

영화의 티져 포스터를 처음 본 것은 서울의 어느 극장 포스터 소개란이었다. 영화가 개봉되기도 6개월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어디서 또 이런 이상한 어린이용 영화를 만들고 있나? 이 정도로 생각이 미쳤지만, 제작자가 차승재인걸 보고 어!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영화가 개봉되고 참혹하게 관객에게 유린되고 결론을 말하지 않는 지인들을 통해 궁금증을 더해갔다. 몇 번의 휴일이 지나도 여유가 생기지 않던 이 영화로의 접근은 연이은 연휴를 통해서만이 가능했다. 그때는 이미 쑥스럽게도 한해를 넘긴 다음이었다. 어두운 조명 속에 가려진 감독의 메세지가 지루함을 전해주는 메세지로 머물수도 있었겠으나, 영화가 끝난뒤의 이상한 여운은 재미가 있다 없다가 아니라 대단하다!라는 말로 이어지니, 말 그대로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정치의식과 사회의식 가득한 블랙 코미디가 아닐 수 없었다. 지구는 안드로메다 왕자의 손아귀에서 놀아났지만, 그 외계인이나 지구인이나 별반 다를바 없었으며, 그들의 차이없음 사이에서 지구는 고스란이 숨통을 죄며 괴로워하고 있음이다. 역시 지구인이 지구를 지키는 것도 안드로메다 왕자가 지구를 지키는 것도 아닌, 정의와 순수함만이 지구를 지켜낼 수 있었겠지만 이 두 단어는 더 이상 지구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지구는 이미 죽어가고 있다.
영화는 진짜 외계인을 찾아서 죽이는 것으로 어머니로 대표되는 지구를 구하려는 병구와 그런 병구에게 납치당한 안드로메다 왕자 강사장의 사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외계 침투세력인 외계인은 지구인 중에서도 권력으로 대표되는 파워를 가져 지구인의 적이 아닌 병구에기만 국한되는 원한의 적으로 한정되면서 다각화된 의미를 가진 싸움으로 이미지화된다. 영화 종반부까지 과연 이 영화의 주인공이 미쳐버린 데다, 힘도 없고 멋있기는 커녕 엑스트라한테 빰이나 맞는 어설픈 주인공인가 의아해 하던 관객들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가까운 안드로메다 왕자의 또 다른 파워를 통해 힘빠지는 결론과 함께 주인공 병구를 영화 끝가지 지지하지 못한데 대한 무거운 숙제를 넘겨 받는다. 단순히 뒤집기가 일품이었던 결론 때문에 놀라운 것이 아니라 이 결론이 전해주는 다양한 주제의식이 이 영화를 놀랍게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지극히 단순해 보일수도 있는 짧은 이야기는 주인공들의 명연기와 상상력이 돋보이는 에피소드, 소품 등에 의해 전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무대를 선사해 준다. 신하균의 어벙하면서 진지한 연기와 온 몸을 던지는 백윤식,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아 버린 순이 역의 연극배우 황정민 연기 역시도 더 없는 보너스다. 물론 홍보와 마케팅 전략의 실패가 신인감독에게 끼친 우울증이야 어찌 별것 아니라 하겠으나, 이 작은 시작을 결코 간과하지 않은 관객들은 흥행성적 못지 않은 보답일 것이다. 한국영화의 미래는 관객 500만을 넘어서 1000만을 향해 달려간다는 싸구려 영웅주의 영화 <실미도>의 흥행성적 때문이 아니라 <지구를 지켜라>와 같이 버림받은 걸작들이 미약하나마 지구를 지키듯 한국영화를 지켜가기 떄문에 밝다.
by kinolife 2006. 9. 27. 00:20
2003년, 한국, 108분
감독: 오종록
출연: 차태현
       유동근
       손예진
       성지루
       이병욱

오우 마이 갓!. 이미 이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말이 안되는 영화라는 사전지식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참담한 영화이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정확히 10분도 되지 않아 다른 곳을 두리번 거리며 컴퓨터 옆 화면에다 헥사외 비슷한 오락게임을 열어두고 봐야만 했던 이 지루하고 한심천만인 영화는 시네마서비스의 자살행위, 혹은 아이디어 찾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을 반증하는 영화같이 느껴지게 한다. 더욱 답답한 것은 이런 영화가 한국영화가 재미있어졌다는 순풍에 자연스럽게 편승해 돈을 번다는 것이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과연,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제작사 이름이 팝콘필름 이던데, 팝콘처럼 먹어도 배 안 부르고 먹기 귀찮고 손이나 입술에 버터 향기를 남겨야만 되는 팝콘같은 영화를 만들 작정인지....정말이지 두고 볼일이다.

영화의 내용은 어릴적부터 엄마를 잃은 일매, 일매에게 엄마의 젖을 물리게 되면서 반쯤 자신의 젖을 빼앗겨 버린 태일의 태고적 관계를 알리는 애니메이션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그리고 이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젖 동기는 같은 동네, 같은 학교에서 성장하면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의 끈을 물고 간다는 필연적 상황을 두고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 '첫사랑 사수궐기대회'는 말 그대로 주인공 태일의 완벽한 원맨쇼로 막을 내려 버린다.

고등학생이 된 태일은 일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아니 집착이 점점 커져간다. 하지만 일매는 그저 지켜볼 뿐. 일매의 아버지이자 태일의 선생님인 영달은 자신과 닮은 모습의 태일을 경계하면서도 태일에게 사윗감으로서의 포지션을 지정하는 것과 함께 선생으로서의 목적달성을 위해서 태일을 달금질한다. 마치 키가 얼마치 자라면 딸과 결혼 시켜 주겠다는 김동인의 소설 속 인물처럼 성적이 얼마 오르면, 사법시험에 합격을 하면 이라는 싸구려 조건들을 달아대는 선생이자 미래 장인은 속물이며 해괴망측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장난에 놀아나는 맹목적 사랑의 달성욕구자 태일의 캐리거 역시 만만찮게 해괴하다. 이런 주인공들의 어거지 같은 캐릭터들은 마치 이 배우들의 전작과 전혀 다를바 없는 연기를 요구해 지극히 지루함을 불러일으킨다. <가문의 영광>를 벗어나지 못한 유동근은 말할바 없으며, <연애소설>에서 퇴이보한 차태현, 퇴일보한 손예진은 말 그대로 속이 상할 정도. 물론 감초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이는 성지루의 캐릭터는 고등학교 선생한테 쩔쩔매는 조푹 두목치곤 어색하며, 마치 선생이 조폭 두목같은 인상을 주면서 영화가 말이 안될때마다 이야기를 풀어주는 해결사 역할을 하지만, 역시 급조된 냄새가 많이 나는 캐릭터다.

이런 좌충우돌 잡다한 이야기 속에서 보다 선을 찾지 못하는 캐릭터는 일매, 별 색깔없이 흐르던 여성 캐릭터는 태일을 정말 좋아해서 병도 숨기고, 바람둥이와 결혼하겠다는 기이한 순애보를 보이면서 영화보는 사람을 까무라치게 만든다. 물론 더 까무라칠 것은 사법고시를 포기하고 의대에 가서 일매의 병을 고치겠다, 고칠 수 있다고 외치는 태일이지만, 이 영화의 전개방식으로 봐서는 뭐 별로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감독이 의대에 합격시켜서 일매의 병도 고치고 잘먹고 잘살았단다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이야기이다. 그 정도로 이 영화의 이야기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비틀어지고 뒤 틀린 고스톱 판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3장짜리, 4장짜리 두꺼비와 다를바 없기 때문이다. 법대가 안된다면 의대를 가는 식이되는 것이다.

말이 안 되는 캐릭터에 지루한 이야기, 배우들이 판에 박은 연기에 의존한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위험성은 스타만 쓰고, 조금 웃기기만 하면 돈이 될거라고 생각하는 제작풍토가 우리 영화계에 주는 폐단 일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그게 좀 불안했는지 여주인공에게 야시시한 수영복을 입히고 그것이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각도로 음침하게 보이게 한 잔꾀까지 쓰고 있지만 역시 이 영화의 얄팍함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음이다. 이 영화의 얄팍함이 싸구려 관객들을 만들고, 그 뜨내기 관객들이 진지한 영화의 앞길을 막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보다 튼튼한 문화적인 토양이 필요한 이 때에 <첫사랑사수 결기대회>는 방금 효과는 좋지만 점점 땅을 못 쓰게 하는 화학비료처럼 해악이 느껴지는 영화다. 고로 관객들은 이러한 얄팍한 영화에 대해서는 촬영불가 사수대회라도 가져야 할판이다.
by kinolife 2006. 7. 31. 21:58
2002년, 미국, 95분
감독: 앤드류 플래밍(Andrew Fleming)
출연: 마이클 더글라스(Michael Douglas)
       알버트 브룩스(Albert Brooks)
       로빈 터니(Robin Tunney)
       라이언 레이놀드(Ryan Reynolds)
       제이 슬로엔(Lindsay Sloane)
       캔디스 버긴(Candice Bergen)

최근의 헐리우드 영화들, 그 중에서도 코미디 영화들은 크게 진보를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예전의 영화들을 유지하는데도 힙겨워 보인다. 물론 중간중간에 나쁘지 않은 영화들을 두고 궂이 아무생각 없이 오래간만의 휴일에 이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한 나의 아무런 생각없는 선택이 빚어낸 결과겠지만.....아무튼 킬링 타임용으로도 조금 부족해 보이는 이 이상한 사돈 이야기는 영낙없는 비디오용 영화 이상은 아니다.

우리 보다는 사돈이라는 관계가 열여 있다고는 하나 역시 2촌이라는 관계가 주어진 핏줄의 세계와 그 핏줄이 만들어낸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끼리의 가족관계의 형성이 어찌 자연스럽고, 편하기만 하랴. 하지만 영화를 위해 만난 C.I.A 사돈이란 가히 불편함을 넘어선 당혹스러움이다. 신출귀몰, 때 아닌 때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낯설디 낯선 장소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오해살만한 행동을 보이곤 해명없이 또 행방불명...아버지의 정체를 아는 아들은 장인 장모 앞에서 얼굴을 못 들 지경....더군다나 이러한 아버지의 비밀을 옹호하고 풀어줘야 할 엄마는 아버지와는 앙숙관계라니, 이정도 되면 아버지는 어떠한 핑계를 대서라도 못 보는 걸로 하는 것이 신상에 좋으련만, 역시 결혼식이란 있어야 할 사람들이 다 있어야 하기에 영화는 이런 사돈의 부재를 허락할 수 없다는 둣, 사돈의 비지니스를 파고 들면서 영화를 끌어간다.

자! 예상 대로 신랑의 아버지 스티브는 복사기 업체에 다니는 사람으로 보기에는 너무 이상하게 안 나타나고, 너무 이상하게 사라진다. 하지만 신부의 아버지, 즉 바깥 사돈 제리는 적지 않게 스티브의 일에 개입하게 되면서 조금씩 그 존재를 관객에게 할려주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는 첩보활동의 세계에 있는 다사다난한 일들이 에피소드로 소개되는 것은 물론이다. 어쩌다가 스티브의 프로젝트에 깊숙하게 개입되게 된 이 사돈 제리, 적지 않게 다이나믹한 일들과 막닥트리게 된다. 이상한 행동을 일삼는 프랑스 놈(이 장면에서 미국인이 유럽인 특히 프랑스인에게 가지는 나쁜 이미지들을 이렇게 표현하나 싶다.)이 제리에게 침을 흘리는 장면이나, 비행기를 못타는 제리가 바브라 스트라이잰드의 헬기에 얹혀선 겁을 내면서도 좋아하는 장면이라거나, F.B.I로부터 전설의 살인마라는 오해를 사는 것 조차도 코미디 영화에서 흔히 쓰일 수 있는 장면이기는 하나 재미있다거나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의 이야기는 크게 사돈 스티브의 공작활동과, 그 공작원의 아들 결혼식이 잘 이행되기 위한 과정을 뼈대로 사돈 제리가 스티브의 일에 관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헤프닝, 그리고 그 헤프닝 사이에서 발현되는 좋은 아버지 상에 대한 의문을 통한 가족애 발현 등으로 이 영화를 이야기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역시 이 영화가 좋은 영화가 되기에는 조금 각이 안 맞아 보이는 부분이 있어 전체적인 흐름에서 자연스러운 재미를 주지 못하고 있다. 공작활동이 분명하고 세밀하지 못하다는 것과, 후반부에 가족애를 찾는 부분이 급작스럽게 도출된다는 점... 그리고 사돈의 매개가 된 젊은 커플의 에피소드가 영화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 전체적으로 영화의 균형을 잡지 못해 큰 재미를 선사하진 못한다.

영화의 스케일은 둘째 치더라고 B급 영화, 비디오용 영화에서도 잘 만들어진 영화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 <위험한 사돈>의 경우엔 작은 영화로 보기에는 마이클 더글라스 라는 이름이 무게가 적지 않은데, 영화가 이 정도고 보면 마이클 더글라스의 낙마가 너무 크지 않나 싶고, 수작이나 문제작의 중간에 끼워진 쉬어가는 작품으로 보기엔 그의 최근 활동이 두드러진 것이 없으니 역시 한물 간건가! 싶은 생각이 많이 들게 한다. 이런 그의 안타까운 행보 사이에 오래간만에 출연해 잠깐 얼굴을 보여준 캔디스 버긴이 반가웠던건(그녀의 코미디 연기가 놀랍다.) 그 나마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눈에 들어올 것 없는 그림, 생각할 필요 없는 이야기, 관객을 크게 즐겁게 할 일도 없는 배우들의 이모저모는 이 영화의 가치를 개봉 이후 짧은 시간에 반짝 비치다 사라질 작품임을 확신하게 한다. 킬링 타임용으로 쓰기에도 용도가 그리 크지 않는 시원찮은 코미디물의 전형이다.
by kinolife 2006. 7. 31. 21:54

2002년, 한국, 96분
감독: 윤제균
출연: 임창정
     하지원
     최성국
     유채영

<두사부일체>를 보면서 내내 찜찜함과 우울함을 금할 수 없었던 나는 그 이상한 정체불명의 영화로 흥행에 성공했던 그 감독의 두 번째 영화를 주변의 엄청난 이슈와 찬사 이후에 철 지난 외투를 벗지 못하는 이상한 찜짐함을 느끼며보았다. 아이디어가 넘치는 건지, 아니면 영화제작의 열정이 넘치는 건지 연이어 바로 다음 영화를 내 놓은 이 충무로 행운아 흥행감독의 두 번째 작품은 역시 첫번 째 보다는 진 일보. 나쁘진 않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즐거움은 코미디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적당히 희화화된 캐릭터들. 그리도 그 다음은 역시 조금은 모자란 듯한 그래서 혹시 나빠질 지 몰랐던 함정을 피해간 에피소드의 적절한 양이다. 영화 <색즉시공>은 미국의 <어메리칸 파이>나 독일의 <팬티 속의 개미> 류의 영화들과 비교해서도 전혀 빠지지 않을 섹스 코미디를 보면서, 우리도 이제 우리만의 섹스 코미디를 가진다는 기대감에 적당히 부응하는 여유를 보여준다. 어색하지도 과장되지도 않아 보이는 에피소드가 가지고 있는 이 영화의 힘은 역시 감독 스스로가 밝힌데로 에피소드의 대부분들이 주변, 혹은 자신의 경험담이었다는 사실성에 바탕을 둔 이야기들이기 때문일테다. 그래서 이 영화 속의 웃음은 실제 이런류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들에겐 신선함으로, 실제 경험이 있던 이들에겐 경악스러운 유머로 다가왔을 터, 역시 정열 아니 정력이 넘치는 청춘은 그 때만의 정말이지 성(性)스러운 묘약과 웃음이 담겨져 있는가 보다.

'성적 괴담'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자 요리법이나, 자위행위의 정열은 가히 남성들의 성적 치기를 본격적으로 보여준 장면들, 그런가 하면 영화 속의 여성들이 성에 대해 당당한 일면을 보여주는 부분은 놀라운 부분이기도 하다. 침대를 놓고 본다면, 여성 상위 형식의 체위도 그렇거니와 숫총각을 "머리가 뽀개지겠다"는 문장으로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이는 것이나, 혹은 섹스를 하지 않은 대신 손으로 봉사(?)를 하는 여성까지 기존의 영화 속 침실 위에서의 여성 캐릭터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 바람난 남차 친구에게 "그만 놀고 네 자리로 돌아오라"고 말하는 당당함이나,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며 연인의 머리에 크레디트 카드"를 날려버릴 수 있는 모습까지...현실적이면서도 톡톡튀는 여성 캐릭터들은 흔히 남성들만의 이야기로 치부될 수 있는 성 이야기의 성의 균등을 이뤄내는 캐릭터들이다.

물론 이런 캐릭터들의 살아있는 연기가 가능한 것은 에피소드들의 자연스러운 연결 때문이겠지만, 우리의 불쌍한 청춘 은식은 물론이거니와 조연들의 주인공 못지 않은 연기를 빼 놓고는 이 영화의 성공을 야기 할 수 없을 듯 싶다. 특히 은식 역을 맡았던 임창정은 적어도 자신있게 제 2의 연기과정의 발판 마련이라고 해도 무관할 정도의 연기를 보여준다. 역할상 순수하지만 고집스럽고, 어눌하지만 자기 의지가 있는 이 미련해 보이기까지 한 청년 은식은 여드름 투성이에 진지하려 해도 얼빵해 보이는 임창정의 얼굴이 있었기에 더욱 더 돋보이는 것이다. 거기다가 시트콤에서 발군을 실력을 발휘한 최성국, 가수에서 연기자로의 변신이라고 해도 무관할 유채영의 연기는 의외의 발견. 물론 전문 조연 연기자들의 연기를 말할 나위 없겠다.

영화 <색즉시공>을 보고 누군가는 연인들끼리 보기엔 좀 민망하다고도 했고, 또 누구는 꼭 연인들에게 권해주고, 혹은 주어야 할 영화라고 극찬하며 침을 튀키며 말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개봉 당시 극장가를 흥행의 폭풍으로 몰고, 코미디의 전성기라는 고뿔을 늦추지 않게 했던 이 영화 <색즉시공>의 힘은 역시 끼 넘치는 엽기적 상상력과 폭발하는 웃음의 힘이 뒷받침이 되어서였겠지만, 어리한 청년의 짝사랑과 그것의 표현이 없었다면 정말이지 색이 넘치는 공허한 영화로 남았을 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눈물의 차력'이 보여준 임창정의 차력쇼는 하지원의 상황과 눈물로 교차되면서 이 시대의 성과 이 시대를 비켜가는 사랑법에 대한 만감을 보여주며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웃음과 눈물의 적절한 조화는 쉼 없이 허무한 웃음으로만 치달았던 전작 <두사부일체>와 이 영화를 구분짓게 하는 경계선 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윤제균 감독의 이번 영화 <색즉시공>은 덜 부담스럽고 덜 싸구려 같다는 점에서 가볍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상업영화로서의 이 영화는 그렇게 나쁘지 않아 보인다.  

by kinolife 2006. 7. 14. 22:43
2002년, 미국/영국, 89분
감독: 가이 리치 (Guy Ritchie)  
출연: 마돈나(Madonna)
       아드리노 지아니니(Adriano Giannini)
        진 트리플혼(Jeanne Tripplehorn)

영국의 활력넘치는 영화 감독 가이 리치와 활력 하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미국의 마돈나와의 만남! 이들이 만남이 이루어낸 또 다른 결과물인 영화 <스웹트 어웨이>는 이들 각가의 명성에 비해 많은 부분에서 뒤 쳐저 보이는 안타까운 작품이다. 1974년에 이미 만들어진 적이 있는 리나 베르트뮐러 감독의 이태리 영화 <귀부인과 승무원>을 가이 리치 부부식으로 리메이크한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제목  'Swepy Away'는 휩쓸리다. 혹은 조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 즉 귀부인이 승부원 아니 어부(이 영화에서는 어부라는 점에 많이 강조된다.)가 조난을 당해 사랑에 휩쓸리기 까지 한다는 이야기일테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귀부인과 가난한 어부의 사랑이 아니라 마돈나의 탄탄한(아지까지도) 몸매와 미국의 거부들이 놀고 먹는 휴양지가 안겨다 주는 시각적인 만족도가 더 크다는 점에 있어 쏟아지는 외부적인 혹평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돈이 많다보니 시간까지 넘쳐 흐르는 미국의 갑부 커플 세 쌍은 지중해로 색다른 여행을 위해 배에서 내린다. 명품으로 둘러싸인 패션은 화려함을 더하고 거만하기 이를때 없는 이들의 표정은 말 그대로 돈 쓰로 오신 마나님과 서방님의 정형이 아닐 수 없다. 이 중에서도 유독 한 귀부인은 입이 닭나발 처럼 튀어 나와 모든 것에 불평 불만을 늘어 놓는다. 배가 후지다고 한마디, 체력단련실이 없다고 한마디, 금방 잡은 물고기를 썩었다고 한마디, 커피를 새로 뽑지 않고 데워 왔다고 한마디, 티 셔츠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한마디, 이 단계에 이르면 시중을 들고 있는 승무원이자 어부인 페페 말고도 영화를 보던 모든 이가 이 귀부인 마돈나에게 재수없다는 평가를 한마디 내릴 만하다.

그러나 모든 헤프닝은 앙숙관계에서 부터 시작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느 로맨틱 코미디(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로 보기에도 좀 어색하다. 그냥 웃기는 사랑 이야기가 로맨틱 코미디라 칭할 수 있다면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의 정수이겠지만.)처럼 이 재수없는 귀부인과 돈은 없지만 자존심이 살아 꿈틀거리는 어부는 휴양지 근처의 많은 어느 무인도에 정박하게 되면서 새로운 관계를 싹 띄운다. 명령하던 귀부인은 얻어 받거나 무릎을 꿇고 애걸해야 했으며, 온갖 조롱을 받아내던 어부는 어느새 마스터가 되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물고기를 잡아올리시는 당신 진정한 어부이십니다." 싸이의 노래처럼 무인도에서는 어부가 진정한 챔피언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 넓은 땅에 둘 밖에 없다는 한계와 자연의 개척과 생존이라는 공동의 과제앞에서 서로에게 싹드는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물론 밤낮을 함께 보내며 외로움을 달래고, 시간을 같이 보내는 남녀에게 정이 안 싹틀수가 없으니 이미 사건을 인태된 셈이다. 특히 낡은 무인도의 집을 헤집다가 발견한 술을 마시고 쇼를 감행하는 마돈다는 여지 없이 자신의 본업이 댄스가수였음을 관객들에게 알려준다. 솔직이 이 영화 속에서의 마돈나의 연기는 말 그대로 볼품이 없었으므로 그러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덕분인지 마돈나의 상대역을 맡았던 아드리노 지아니니의 연기가 자연스러운 맛을 내는 것 처럼 보인다. 그의 이력을 찾아 보니 1974년 작품 ,<귀부인과 승무원>에서 승무원 역할을 맡았던 지안카를로 지아니니의 아들이란다. 어찌 되었건 이들 커플의 어색한 앙상블은 이 영화의 스토리까지도 지지부진하게 만드는 것 같은 인상을 남긴다. 영화는 후미로 가면서부터는 맥이 빠지면서 바람빠진 고무풍선 처럼 변해 버리고 시들해진다. 특히 이들이 구조되고 그들만의 사랑을 확인하는 부부에서는 실소가 터져 나오는 지경. 어느 무명의 감독 데뷔작보다 못한 이 영화의 연출력은 전작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와 <스내치>에서 깔끔하면서도 독특한 연출력을 보여주었던 감독의 영화라고 보기 힘들게 한다. 말 그대로 가이리치의 대표적인 실패작인 셈이다.

하지만 팝콘이랑 함께 하면 좋을 영화에 그리 큰 작품성을 논하지 말고 마돈나의 패션과 아름다운 휴양지에 시선을 맞춰보자. 그리 나쁘지는 않다. 단지 가이 리치의 영화에 연출력에 대한 적당한 실망감과 이제 서서히 늙어간다는 것의 징후를 마돈나의 얼굴에서 찾는 씁쓸함이 조금 불편하게 할 뿐이다. 거기다가 과거의 영화를 리메이크 할 때 범하기 쉬운 우려들을 그대로 표출하는 점과 영화 시작 오프닝에서 마돈나의 노래와 함께 느낄 수 있었던 007 같은 매력적인 분위기가 오래되지 않는 다는 것은 이 영화에서 수 많은 헛점 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점이다. 이 모든 것 역시 관객들이 새겨 본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흥행성적 저조는 당연한 귀결이리라. 이런 평가와 결과에 대해 마돈나가 팬들에게 "제발 봐주세요"라고 했다는 외신은 어느 당당한 팝 스타가 남편을 잘못 만나 그렇게 된건지, 또 그도 아니면 어느 창창한 신예영화감독이 부인을 잘못 만나 당하는 혹독한 형벌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사랑에만 충실하고 일에는 나태한 것에 대한 결과인지 아리쏭하다. 웬지 영화는 세 번째 이유가 아닐까 하는 힌트를 주는 것 같이 보인다.
by kinolife 2006. 7. 14. 22:40
2002년, 미국, 125분
감 독: 알렉산더 페인 (Alexander Payne) 
각 본 : 알렉산더 페인(Alexander Payne)
          짐 테일러(Jim Taylor)   
원 작 : 루이스 베글리(Louis Begley)

출연: 잭 니콜슨(Jack Nicholson)
        호프 데이비스(Hope Davis)
        더몬트 멀로니(Dermot Mulroney)
        렌 카리오우(Len Cariou)
        하워드 헤스먼(Howard Hesseman)
        케시 베이츠(Kathy Bates)
        준 스큅(June Squibb)
        매트 윈스톤(Matt Winston)
        해리 그로너(Harry Groener)
        코니 레이(Connie Ray)
        필 리브스(Phil Reeves)   
        제임스 M. 코너(James M. Connor)   
        스티브 헬러(Steve Heller)   
        안젤라 랜스베리(Angela Lansbury)   

음 악 : 롤페 켄트(Rolfe Kent)   


같은 직장에서 30년을 전후하는 시간동안 근속 근무를 한다는 건 요즘같은 직장 분위기, 근무 환경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힘든 일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장애도 많고,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 쯤으로 치부되기도 쉽고, 요즘에도 그런 마인드로 일하는 사람이 있다니 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만큼 한 직장에 뿌리를 박고 일을 한다는 것은 언제부턴가는 능력이 없다는 것의 한 증거가 되기도 했고, 고지식하다는 말과 연관되어 그 사람의 경직성을 표출하는 다른 표현이 되기도 했다.
그래미 시상식에서 남우 주연상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달고 개봉한 영화 <어바웃 슈미트>는 그 수상자의 이름이 잭 니콜슨이라는 사실에 어느 정도 안정적인 연기를 기대하며 영화에 다가가게 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순간엔 그가 아니면 안되는, 아니 그를 진짜 연기자로 만들어준 영화구나 라는 생각을 쉽게 하게 된다. 이 바보같고 꽉 막힌것 같은 슈미트는 말 그대로 잭 슈미트여만 가능헐 것 같아 보인다.

평생친구였던 직장과의 영원한 이별, 그리고 그것이 사회로부터의 격리라는 걸 알게 된 슈미트, 정확한 시간에 몸은 움직일 준비를 하지만, 슈미트에겐 그의 움직임을 필요로 하는 곳이 없음을 알게 된다. 자신만의 시간이 많아질거라 기대를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세상은 너무 많이 변해 버렸고 세상의 어느 곳도 그의 새출발에 무관심하다. 여유로와 곤혹스러운 낮 시간은 그의 허전함을 더욱 배가 시키는 증거가 될 뿐이다. 그 낮 시간에 우연히 보게 된 TV속의 운두구는  그의 허전함에 속에서 유일하게 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미지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런 그에게 지저분하고 너무 싫어하는 습관으로 학을 떼게 하는 지겨운 아내의 죽음,  죽음 이후 밝혀지게 되는 친구와 아내와의 불륜은 이제 그가 믿었던 가족은 가짜였으며, 그를 일하게 해준 사회는 단순히 그를 이용한 장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는 슈미트를 버렸고, 슈미트 혼자에게  남겨진 가정은 모든 의미상실이 벽에 부닥트리며 힘을 잃고 만다. 말 그대로 팔 떨어지고 다리 부러진 연은 이제 곧 어느 이름없는 촌동네의 나뭇가지에 걸려 떨어지고, 부서져 날아가 없어져야 할 판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성에 차지 않는 사위와 상식적으로 받아들여 지지 않은 사돈은 자신이 살아온 삶 전체에 대한 도전 바로 그것이다. 이런 그에게 있어 자신의 딸의 결혼식이 있는 도시로 가기까지의 혼자만의 여행(물론 딸의 홀대로 시작된 여행)은 진정 열린 시간을 다시 자기식으로 재배열할 수 있는 계기인지도 모른다.

영화 <어바웃 슈미트>는 그래미 시상식에서의 잭 니콜슨의 말대로 드디어 자신의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하게 된, 어느 명배우에게 제 2의 인생에 대해 쏘아 올려진 화려한 신호탄과 같은 작품이다. 잘생겼지만 엽기적인 더몬트 멀로니의 망가짐, 케시 베이츠의 화끈함은 이 영화가 코미디 영화임을 잊어버리지 않게 한다. 하지만 곳곳에 산재해 있는 웃음이란 인생을 살면서 만나게 되는 뜻하지 않은 복병처럼 쉽고 편한 웃음이 아니며 채 웃음이 다 터지기 전에 인생은 황혼을 향해 달려감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 속의 웃음이 주는 여운은 쓸쓸하다. 그 인생의 진실을 슈미트는 아내의 고집스런 버스 위에서 촛불을 밝히며 혼자 잠들고 혼자 깨면서 알 수 있으며, 거짓스런 인생 속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딸아이의 결혼식과 무지한 웃음 속에서 한숨 쉬며 어렵게 깨닫게 된다.

지나온 시간이 많기 때문에 남아 있는 시간이 훤히 보이는 이 나약한 늙은이 슈미트는 모든 사람들이 늙어갈 모습에 대한 한 전형을 보여 주늗 것 일지도 모른다. 영화 말미,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자신의 계좌와 일치하는 먼 곳의 가난한 나라의 소년 운두구는 그나마 슈미트에게 남겨진 선행과 봉사라는 이름의 마지막 의무인 셈이다. 혼자 남은 무력한 노인에게 의무란 가장 큰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행복하게 할 이 슈미트의 숙제 운두구는 고마움을 담은 편지 속의 욕심없는 그림을 통해 그에게 가장 인간적이며 시원스러운 통곡까지 선사한다.  써늘한 자신의 작은 집은 그의 울음을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며 그가 죽어가야 할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장소이다. 이 장면에서의 잭 니콜슨은 이 세상 모두의 늙어버린 슈미트의 모델 같아 보인다. 이 영화의 원안이 되었다는 1996년에 발표된 루이스 베이글의 동명 소설이 그의 통곡 때문에 더욱 더 궁금해 진다. 인생의 씁쓸함을 담고 있는 휴먼 코미디의 정수 <어바웃 슈미트>에게 <늙어감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붙여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을 듯 싶다.
by kinolife 2006. 7. 13.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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