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자우림이 나왔을 때 난 그들이 누구인지 몰랐고, 우연히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나온 이 맹랑한 아가씨가 크렌베리즈(Cranberries)의 노래 "Dreams"를 부를 때 내가 모르는 외국가수가 시원시원하게 노래를 한다고만 생각하고 채널을 넘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조용한 밴드의 공연 소식이 지방의 어느 벽보판까지 잠식할 때 꽤나 인기 있는 젊은 밴드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관심은 생일선물로 받은 조성모 1집을 들고 레코드 가게를 찾아가 이 밴드의 데뷔앨범으로 바꿔 들으면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그것이 자우림을 제대로 듣게 된 게기이기도 하고, 관심을 가지면서 계속 무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벌써 몇년이 흘렀나 자우림도 중견 아닌 중견이 되었고, 다들 자리 잡고 지 갈길 가고 하는 이 밴드의 진정한 리더 김윤아는 또 다른 변모된 모습으로 두번 째 신보 <유리 가면>을 내 놓았다. 가면은 썼지만 유리가면이라 자신을 숨길 수 없는 가면은  진정, 혼란함을 담고는 있지만 자신의 영리함과 자신감을 여지 없이 보여 주기엔 안성맞춤인 제목 같아 더 없이 김윤아 스럽다.

전체적으로 앨범을 다 듣고 나면 자신의 애인으로 알려진 기타리스트 방준석과의 관계가 이상기류를 띠나 왜 이리 우울하나 싶으면서도 그 알수 없는 추측의 애정전선에 의혹을 품는 순간, 그것보다 더 중요한건 그녀의 노래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시대를 거슬러 윤심덕의 용기어린 비극을 떠올리게 하는 복고적이면서도 음울하고 권태로운 분위기. 그리고 그것을 관조하는 그녀의 노랫말이다. 사랑은 시작이 되는 순간부터 정해지지 않은 그  끝을 향해 달려가는 열차와 같다. 그래서 끝나가는 혹은 끝나버린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고.  때론 사치이기도 하다. 네번째에 자리잡은 곡 "야상곡"은 사랑이 끝나가는.. 그래서 더 애절하게 기다리게 되고, 또 잊으려 하고, 사랑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는 사랑의 이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화 <봄날은 간다>의 동명 타이틀 주제곡이 가지고 있었던 느낌을 한껏 북돋우는 타이틀이다. 영화안에 내재된 이율배반적인 사랑의 논리를 다시 곱씹게 한다는 점에서 마치 연작의 후속곡 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이어지는 곡 "나는 위험한 사랑을 상상한다" 역시 그녀만의 단어(식품처럼 소모될 열정, 날 위해하는 불안한 사랑 등)가 가진 음율이 주는 묘미를 여지 없이 보여주는 곡이다. 마치 시큼시큼한 치즈같이 입에 와 닿자마자 온 몸으로 스며들어 감각적으로 흡수되는 것 같은 그녀의 가사는 고급 치즈에 맛을 들여 수퍼에서 파는 치즈를 치즈로 인정하지 않게 되는 불치병 같이 치명적인 것이다.  앨범에 수록된 거의 모든 곡에는 기다리고, 그리워 하고 때론 한탄한다는 반복적인 사랑의 행위가 내재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소모되고 다시 피어나고 자신을 갉아먹고 또 다시 채워 꽃피우게 한다는 불가항력적 기대감의 반복이라는 암시도 놓지 않는다.

이제까지 나온 여느 사랑의 노래 보다 처절하지만 사랑의 본질을 보다 정확하게 보고 있는 이 앨범의 매력은 지극히 자극적이면서도 지적이어서 마음을 아리게 하고 머리를 복잡하게 하면서 깊숙하게 박혀 버린다. 이런 애상은 나도 모르게 다가왔다가 어렵게 떨어져 나간다는 점에서 너무나 사랑의 본질과 닮아 있기도 하다. 이런 노래를 만들어 낸 가수 김윤아는 노래를 잘하는 혹은 이쁜 가수가 아니라 여우 같은 영리함을 숨기지 않는 가수이며, 솔직하고 과감하다는 점에서 여우 중에서도 개성 넘치는 여우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김윤아는 싫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김윤아의 노래를 싫어하는 건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그런데, 근래의 어느 신보보다 가까이 두고 반복해서 듣고 있다.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이 우울한 사랑의 묘미를....가면을 쓴다고 써도 다 보이는 사랑을 말이다.



by kinolife 2006. 4. 18.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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